[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미라, version=775, paragraph=1.3.2)]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조선왕릉, version=292)] 회곽묘(灰槨墓)는 무덤 양식의 일종으로, 묘광 안에 관과 곽을 보호하기 위한 석회층을 만들어 관과 곽을 안치하는 방식이다. 석회층을 만드는 과정은 회격(灰隔)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유행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초기까지는 돌방무덤이 대세였지만 [[세조(조선)|세조]]가 승하할때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당시 중국 남부에서 성행하던 회곽묘가 왕가를 중심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이는 사대부나 민간에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이는 정통 [[성리학]]적 무덤 양식이다.[* 돌방무덤(석실묘)보다 무덤의 크기가 훨씬 작아 부장품이 적었고 자연히 만드는 비용이나 인력도 적게 들었다. 도굴이 성행하는 묘는 전부 묘의 크기가 크고 부장품이 많던 돌방무덤이다.] 시신은 썩어야만 하나 시신이 썩기 전까지, 즉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기까지 벌레나 나무 뿌리와 같은 외부 요소로부터 무덤이 침투당하는 것을 방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덤 만들기가 번거롭고 비용도 꽤 들다 보니까 조선 후기 들어서 잘 행해지지 않았을 뿐. 오히려 이 점이 시신을 썩지 않게 했다는 점이 조금은 아이러니. '[[오페르트 도굴사건]]' 당시 도굴당할 뻔했던 [[남연군]]의 묘가 이런 방식으로 매장되어 화를 면한 바가 있다. 이 때 석회를 조금도 아니고 평균 사용량의 몇 배나 썼기 때문에 관을 둘러싼 땅 전체가 매우 단단한 강도가 돼버려서 도저히 도굴할 수 없었다고한다. 회곽묘를 조성할 때에는 시체가 들어가는 구덩이, 즉 묘광(墓壙)을 파고, 그 안에 숯과 삼물([[석회]]와 [[모래]]와 [[황토]]를 섞은 것)을 깔아 회격을 한 후에 만들어진 석회층 안에 나무관과 나무곽을 안치한다. 나중에는 아예 나무곽을 생략하고 회격으로 만들어지는 석회벽을 곽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석회가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면서 굳어질 때 열을 방출, 내부를 섭씨 200도 가량으로 고온 살균해버린 뒤 밀봉하게 되어 자연적으로 미라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부패가 진행될 리도 없고, 수분만 그상태로 증발하여 말 그대로 몸이 바싹 말라 있어[* 공기가 조금이라도 통한 경우 그렇다. 석회를 많이 써서 완전 밀봉되면 피부가 마르지도 않는다. 대구달성군 구지면에서 발견된 한 미라는 그 밀봉상태가 완벽하여 피부의 습기까지도 보존되어 있었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처럼 탄력이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만지면 물컹물컹하다고 표현될 정도.] 모발 한 올까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 회격묘는 내관 위에 외곽을 만들고, 그위에 석회를 부어 회곽을 만드는 형태로 변모하여 한층 더 공기가 통하기 어렵게 되어 시신이 미라화되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특히, 목관의 경우 못을 쓰지않고 '나비장'[* 나비모양의 홈을 파 목재를 끼우는 방식]기법으로 관을 만들었고 긴 시간이 지나도 관이 뒤틀리지 않아 공기가 통하지 않았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유교]]적 관점에서도, 고인의 시신은 온전히 부패해 흙이 되어야 좋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미라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회곽묘 양식으로 만들어진 [[조선왕릉]]은 두터운 석회층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 오페르트 도굴사건에서처럼 몇 없는 도굴 시도도 거의 실패했고, 현재까지 도굴에 성공한 사례가 임진왜란 당시의 [[선정릉 도굴사건]] 외에는 없다. [[분류: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