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장수 황씨]][[분류:밀양시 출신 인물]][[분류:1879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 성명 ||황문익(黃文益) || || 이명 ||황영주(黃永周)·황문익(黃文翊) || || 호 ||국사(菊史) || || 본관 ||[[황(성씨)|장수 황씨]][* 21세 주(周) 항렬.] || || 생몰 ||[[1879년]] [[12월 9일]] ~ [[1953년]] [[5월 8일]][* 12월 20일 별세했다는 기록도 있다.[[http://xn--2e0bj4jzbt84ax4cezj3rbbzptya69c.com/bbs/board.php?bo_table=people&wr_id=79&page=3|#]]] || || [[출생지]]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중항[br](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중항마을)[* [[황(성씨)|장수 황씨]] 집성촌이다.]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황문익은 1879년 12월 9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중항(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중항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단장면 안법리 출신 [[손경헌]]의 주도로 조직된 대한협회 밀양군지부에 가입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1913년 4월, 가족들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랴오닝성|봉천성]] 봉성현(鳳城縣) 봉황성(鳳凰城)[*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펑청(鳳城)시 펑황청(鳳凰城).]에 정착하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였으며, 무송현(撫松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샨(白山)시 푸쑹(撫松)현.]에 있는 백산학교(白山學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0년 11월 흥업단 단장 [[김호(1881)|김호]]로부터 길림성군정서 부속 흥업단 군관 양성자금 20만원을 모금하라는 명령을 받고, 손경헌·이만준(李萬俊)·김인제(金仁濟)·최성기(崔聖基) 등과 함께 권총 5정·실탄 90여발을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 경상남·북도 지방에서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여 6만엔 정도를 모금하던 중, [* 이 사이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기소 상태였으나, 1921년 11월 8일 마산지검 밀양지청에서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내린 바 있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75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621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1922년 12월 26일경 일본 경찰에 검거, 송치되었다.[[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12_26_0500|#]] 체포된 후 그는 오랜 기간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이듬해인 1923년 봄,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 및 강도, 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0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190&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형사사건부]]에 의하면, 1923년 1월 15일 대구지검에서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내린 기록이 확인된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3년 5월 8일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