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서출]][[분류:1425년 출생]]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include(틀:장릉배식록 수록자)] ||<-3><tablealign=right><table 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94153E> {{{#gold '''조선 세종의 왕자'''[br]{{{+1 '''화의군[br] 和義君'''}}}}}} || ||<-2><width=30%><#94153E> '''[[군호|{{{#gold 군호}}}]]''' ||<(> 화의군(和義君)[* 군호는 [[경상도]] [[구미시|선산]]의 별호인 ‘화의(和義)’에서 따왔다.] || ||||<:><#94153E> '''[[시호|{{{#gold 시호}}}]]''' ||<(> 충경(忠景) || ||||<:><#94153E>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94153E> '''[[이름|{{{#gold 이름}}}]]''' ||<(> 영(瓔) || ||||<:><#94153E> '''[[자(이름)|{{{#gold 자}}}]]''' ||<(> 양지(良之) || ||||<:><#94153E> '''{{{#gold 부왕}}}''' ||<(> [[세종(조선)|조선 세종]] || ||||<:><#94153E> '''{{{#gold 생모}}}''' ||<(> 영빈 강씨(令嬪 姜氏)|| ||||<:><#94153E> '''{{{#gold 부인}}}''' ||<(> 군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 ||||<:><#94153E> '''{{{#gold 자녀}}}''' ||<(> 7남 || ||||<:><#94153E> '''{{{#gold 묘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 ||<|2><:><#94153E> '''{{{#gold 생몰[br]기간}}}''' ||<:><#94153E> '''[[음력|{{{#gold 음력}}}]]''' ||[[1425년]] [[9월 5일]] ~ [[미상]](1489년 이후) || ||<:><#94153E> '''[[태양력|{{{#gold 양력}}}]]''' ||[[1425년]] [[10월 16일]] ~ [[미상]](1489년 이후)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조선)|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서장남으로, 어머니는 영빈 강씨이다. [[전주 이씨]] 화의군파의 파시조이다. == 생애 == === 초기 === 1433년(세종 15년)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고[[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1025_001|#]] 1436년(세종 18년) [[성균관]]에 입학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04017_004|#]]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종(조선)|세종]]의 한글 창제에 협력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맡기도 했다. 1441년(세종 23년)에 넷째 형 [[임영대군]]과 함께 평민 여성 2명에게 남자 옷을 입혀 궁 안으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들켜서 실패한 후,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308012_001|#]] 1447년(세종 29년)에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나 그 뒤로도 처백부[* 아내의 큰아버지.] 박대손의 첩과 다른 신료들의 기첩을 빼앗은 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6010_003|#]] 이듬해에 큰형 [[문종(조선)|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복권되었다. 1455년([[단종(조선)|단종]] 3년)에는 이복동생 [[평원대군]]의 첩이었던 초요갱과 몰래 [[간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 다시(...) 직첩을 몰수당하고 가벼운 유배형을 받았다가 곧 방면되었다. === 세조 즉위 이후 === 화의군은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과 함께 세조(수양대군)를 지지하지 않는 몇 안되는 왕족이었다. 이에 1456년(세조 2년) [[세조(조선)|세조]]가 [[사육신]]을 친국할 때, 화의군을 떠보려고 “[[성삼문]] 등을 파직함이 옳으냐”고 물었는데, 화의군은 대답하지 않아 세조의 눈 밖에 났다. 거기에다 그 다음해에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부사인 이보흠과 모의한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 이후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익산시|익산]]에 유배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비참하게 생활하였다. [[성종(조선)|성종]] 때에는 화의군의 아들 이원이 먹고 살기 힘들어 성종에게 도움을 청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1482년(성종 13년) [[성종(조선)|성종]]의 호의로 외방으로 가서 살았고, 2년 뒤에는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살 자유를 얻었다. == 사망과 이후 == 정확한 사망일은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의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005009_001|이 기사]]를 볼 때 1489년(성종 20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묘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60-2동에서 있으며 화의군과 그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있다. 묘역은 2005년 12월 8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1518년(중종 13년) 화의군의 손자 이윤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자손도 종친록에 이름을 올렸다. 1791년(정조 15년) [[단종(조선)|단종]]의 능인 [[장릉(영월)|장릉]]의 충신단에 배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