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옹주]] [include(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 ||<-3><tablealign=right><tablewidth=350><tablebordercolor=#94153e><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4153e 0%, #94153e 20%, #94153e 80%, #94153e)" '''{{{#ffd400 조선 영조의 왕녀[br]{{{+1 화유옹주 | 和柔翁主 }}}}}}'''}}} || ||<bgcolor=#94153e> '''{{{#gold 출생}}}''' ||<-2>[[1740년]]^^([[영조]] 16년)^^ [[9월 2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유옹주 태지석. [[https://www.gogung.go.kr/searchView.do?pageIndex=1&cultureSeq=00020418TS&searchRelicDiv4=&searchGubun=ALL1&searchText=태지석|#]] ] || ||<|2><bgcolor=#94153e> '''{{{#gold 사망}}}''' ||<-2>[[1777년]]^^([[정조(조선)|정조]] 1년)^^ [[5월 21일]][br]{{{-2 (향년 38세)}}} || ||<-2>[[조선]] [[한성부]] [[창성궁]] || ||<width=50><bgcolor=#94153e> '''{{{#gold 부왕}}}''' ||<-2>[[영조]] || ||<width=50><bgcolor=#94153e> '''{{{#gold 생모}}}''' ||<-2>[[귀인 조씨(영조)|귀인 조씨]] || ||<width=50><bgcolor=#94153e> '''{{{#gold 부군}}}''' ||<-2>창성위 황인점[* 본관은 창원이다. ] || ||<width=50><bgcolor=#94153e> '''{{{#gold 자녀}}}''' ||<-2>1남 1녀 ^^(1남)^^ 황기옥[* 1781년(정조 5) [[영희전]] 참봉으로 관직에 올라 양천현령, 재령군수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 ^^(1녀)^^ 김제만의 처 || ||<width=50><bgcolor=#94153e> '''{{{#gold 묘소}}}''' ||<-2>[include(틀:지도, 장소=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산32, 너비=100%)] ----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 산 32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영조]]의 서10녀. 귀인 조씨에게는 차녀가 된다.[*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 귀인 조씨의 장녀는 요절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 생애 == 1751년(영조 27) 영조는 호조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 황인점을 화유옹주의 부마로 결정하고, 창성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듬해 [[화협옹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혼인이 연기되었고, 실제 혼인은 1753년(영조 29)에 치러진다. [[한중록]]에 따르면, 방이 좁은 탓에 화유옹주가 [[혜경궁 홍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빈궁이 얼마나 중한데 제가 감히 그리하느냐"고 혼을 낸 적이 있었다. 인원왕후가 궁중의 예법에 엄격한 사람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세자빈]]의 권위에 임금의 딸인 [[옹주]]라도 맞설 수 없었다는 뜻이다. 화유옹주는 1777년(정조 1)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조(조선)|정조]]는 크게 슬퍼하면서 "선조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라고 말하고 3년간 그대로 녹봉을 주게 하였다.[*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21일 을유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5021_001|#]] ] 영조가 [[딸부잣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대부분 요절한 탓에[* 12명의 옹주들 중 9명이 영조 대에 사망했다.] 정조 대까지 살아있었던 옹주는 화유옹주, [[화완옹주]], [[화령옹주]] 뿐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면서 [[화완옹주]]는 폐서인 되었고, [[화령옹주]]는 [[숙의 문씨]]의 딸이란 이유로 폐서인이 될 뻔한걸 정조가 허락하지 않아서 간신히 옹주 직위를 유지하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던 이는 화유옹주 한 사람 뿐이었다. 후일 정조는 화유옹주와 그 어머니 귀인 조씨의 무덤에 치제하는 등 잊지 않았다. >나의 고모시여 / 曰我姑母 >부드럽고 아름다움을 본받았으니 / 柔嘉維則 >부모님의 당부 말씀을 밤낮으로 지켜 / 蚤夜鞶衿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네 / 不遺寸尺 >병신년[* 영조가 승하한 1776년(영조 52)이다. ] 이후로는 / 維丙以後 >우러르는 나의 심정이 더했는데 / 增予依仰 >심원의 종고에 / 沁園鐘鼓 >도위가 무고하네 / 都尉無恙 >묘소의 입구가 눈에 보이는데 / 墓門延眺 >그 나무가 꽤나 굵어졌으니 / 厥木拱把 >무엇으로 심회를 쏟을까 / 何以瀉懷 >이에 나의 행차를 멈추네 / 爲停予馬 > >---- >《홍재전서》 和柔翁主墓致祭文 그녀의 남편 황인점은 1779년부터 1793년까지 모두 6회에 걸쳐 정사(正使)로서 [[연경]]에 다녀왔다.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같이 간 [[이승훈]]이 [[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교]] 서적을 반입했던 일이 드러나 관직이 삭탈되었다. 죽은 뒤에는 화유옹주와 합장하였다. == 여담 == ||<table width=500>[[파일:화유옹주_출토유물.jpg|width=100%]] || || 《화유옹주 묘 출토 명기》 || * 화유옹주는 도자기를 비롯하여 옥제 비녀, 금동제 비녀, 은제 주전자, 녹색 벼루 등 30점이 넘는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1991년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후손들은 이를 국가에 기증하였다. 현재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복제품은 부천향토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중 도자기는 청화 안료로 장식한 합과 화려한 색으로 등나무 무늬를 장식한 합과 잔이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진한 녹색을 띄는 팔각의 유리병에는 굽 바닥에 '건륭년제' 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남편 황인점이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옹주를 위해 사온 선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