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소행성, rd1=홍대용(소행성))] |||| [[파일:6xjb4Ci.jpg]] || ||||보통 홍대용 하면 교과서에 주로 실리는 그림. 청나라의 문인인 엄성(嚴誠)이 그렸다고 한다.|| ||<:> '''이름''' ||<(><tablealign=center><colbgcolor=white,#2d2f34>'''홍대용(洪大容)''' || ||<:>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 || ||<|2><:> '''출생''' ||<(>[[1731년]] [[5월 12일]] || ||[[충청도]] [[청주시|청주목]] [[수신면]] 장명[br](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장명마을)[* 인근의 해정리에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다.][[http://cheon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eonan&dataType=99&contents_id=GC04500766|#]] || ||<|2><:> '''사망''' ||<(>[[1783년]] [[11월 17일]] || ||[[경상도]] 순흥도호부[br](현 [[경상북도]] [[영주시]]) || ||<:> '''자 / 호''' ||<(>덕보(德保) / 담헌(湛軒)·홍지(弘之) || ||<:> '''부모''' ||父 목사(牧使) 홍역(洪櫟), 母 [[청풍 김씨]] 군수 김방(金枋)의 딸 || ||<:> '''비고''' ||<(> 인척사돈 [[은신군]], [[김정희]] || [목차] == 개요 == [[조선]] 후기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상공업을 육성하자고 주장했던 [[노론]] [[북학파]] [[실학자]]. 노론 사림의 으뜸으로 꼽히던 석실서원의 미호 김원행을 스승으로 학문을 연마했으며 [[빅뱅 우주론|무한 우주론]]과 [[자전|지전설]]을 주장했고[*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석문]]이다. 김석문은 《역학이십사도해》에서 우주 생성론, 우주 구조론, 운동론, 개벽론의 4가지 주제에 대해 논리를 전개하였으며 홍대용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대중에서 설파한 [[과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기도 하며 당대 [[베이징|연경]]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해 본 적이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음률에도 밝았다. [[저서]]로는 《담헌서》, 《사서문의》, 《의산문답》, 《임하경륜》, 《건정필담》, 《주해수용》, 《을병연행록》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의 교분이 매우 깊었고 박지원과 온갖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박지원이 홍대용 사후에 직접 지은 홍덕보묘지명에 그 찬탄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후세대 실학자의 고문이자 후견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을병연행록은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중국]] 견문록으로 꼽힌다. 후에 [[나경적]]과 함께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개량했다. 홍대용은 인물평이 깐깐한 편인데 [[나무위키]]에도 [[촉한]]의 인물인 [[강유]]와 [[제갈첨]] 등의 인물평이 실려있다.[* 담헌서의 사론에는 주로 위진 남북조 시대 인물들의 평이 실려 있다.] == 정조와의 만남 == 1775년(영조 51년) 홍대용은 세자익위사의 시직으로 출사하여 [[정조(조선)|젊은 세손]]을 보필하고 가르치는 자리를 1년간 맡게된다. '계방'으로 불리는 세자익위사(그래서 이 시절에 세손과의 문답을 기록한 홍대용의 담헌서 내부의 기록도 '계방일기'다)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는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시직은 종8품으로 품계는 낮지만 믿을만한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들이 임명되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세자의 말동무도 하고 선생도 하는 까닭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요직에 발탁되기도 했다. 홍대용은 이후 외직만 돌았고 정조가 보위에 오른 이후 몇년 안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쉽게도 중히 쓸 일은 없었다. 세손은 서연 자리에서 홍대용에게 연경의 풍속을 묻기도 하고 율곡 [[이이(조선)|이이]]의 [[성학집요]]와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등 1년간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의양]]이 홍대용을 고문으로 두라고 추천하자 정조는 홍대용의 막힘없는 대답을 보고 "몇 차례 보고 이미 그럴 만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관은 다른 편이었는데 격물치지와 실천을 중시하던 홍대용에 비해 그게 중요한 것은 알지만 치국 평천하의 일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답한다거나 [[강희제]]의 치세가 성군의 치세였다라든지 연경의 번화함을 연경의 등으로 설명하는 홍대용에게 조선 궁중에서 사용하던 등이 아름다웠다며 응수하는 세손의 모습은 이후 두 사람의 행보가 갈린 이유를 설명해주는 일화일지도 모른다. == 홍대용과 서양 음악 == 1772년 6월 18일 오후 7시경 담헌 홍대용의 저택인 유춘오(留春塢: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뜻)에는 홍대용의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홍대용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람들이 [[유럽]]의 바로크 고음악 [[악기]]인 [[덜시머]]와 [[하프시코드]]를 모방해 만든 악기인 [[양금]](洋琴)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이날 연주회는 홍대용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양금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연주법을 몰랐던 홍대용은 수년간 노력한 끝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으로 양금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악보]]도 없는 상태에서 홍대용은 스스로 독주법을 터득한 맑고 청량한 타악기의 [[소리]]를 최초로 조선에 전했다. 홍대용이 중심이 된 '유춘오 악회'란 이름의 정기 음악회에서 [[서양]] 악기를 통한 [[음악]]을 처음 들은 청중들은 감탄했고 자리에 있었던 연암 박지원은 그때의 감동을 자신의 문집 연암집에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함께 기록해 놓았다. 조선의 음악인들은 이를 적극 수용해 [[국악]]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홍대용은 서양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악기인 양금뿐만 아니라 청나라 연경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즉석에서 연주해 [[천주교]] 신부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당시 서양은 [[바흐]] 이후 [[하이든]]이 활동하던 고전 시대. 어떻게 홍대용은 오르간을 직접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독학으로 [[혼천의]]를 만들기도 했던 홍대용으로서는 서양의 악기를 다루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절대 음감을 소유한 음악인이자 조선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로 정평이 난 홍대용이었기에 몇 번의 궁리 끝에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법을 터득했던 것이었다. [[한양]]에 들어갈 때 홍대용은 말을 타고 당시 선진 문물이었던 [[선글라스]](오수경)를 쓴 채 양금을 가지고 들어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의 양금은 [[남양 홍씨]] 가문에 대대로 전수되었는데 조선 말 [[대구광역시|대구]] 사람인 [[서찬규]]가 홍대용의 고향인 [[천안]]을 지날 적에 아주 청량하고 맑은 금속 악기의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홍대용의 후손이 연주하던 하프시코드 소리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분류:과학자]][[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동남구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토홍)]][[분류:1731년 출생]][[분류:178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