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 [[파일:/storage/upload/2009/06/11/63419820_1244334209.jpg]] || ||<:> '''이름''' ||<(><white> '''홍난파(洪蘭坡)''' || ||<:> '''본명''' ||<(><white> 홍영후(洪永厚) || ||<:> '''호''' ||<(><white> 난파(蘭坡) || ||<:> '''본관''' ||<(><white> [[남양 홍씨]][* 토홍계 24세 후(厚) 항렬.] || ||<|2><:> '''출생''' ||<(><white> [[1897년]] [[4월 10일]] || ||<white>[[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br](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 인근의 남양리·시리·안석리와 함께 [[남양 홍씨]] 집성촌이다.][[http://m.ihsnews.com/6587|#]] || ||<|2><:> '''사망''' ||<(><white> [[1941년]] [[8월 30일]](향년 44세) || ||<white>[[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 || ||<:> '''종교''' ||<(><white> [[개신교]]([[장로회]]) || [목차] == 개요 ==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와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다만 후술할 친일 논란 때문에 그 명과 암이 뚜렷하게 갈리는 인물. [[경기도]] [[화성시|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現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나 5세 때 상경, 14살이 되던 해인 1910년 [[성동고등학교|황성기독교청년학관]] 중등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13년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7년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미술, 음악의 3가지 분야에 걸쳐 잡지 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했다. == 작품 == === 동요 === * [[개구리]] * [[고향의 봄]] * [[무지개]] * [[옥수수 하모니카]] * [[퐁당퐁당]] * [[햇볕은쨍쨍]] == 친일행적 ==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72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전향 협박을 받았다. 결국 건강악화 끝에 그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이듬해 6월 18일, 홍난파는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갈홍기]]·[[현제명]]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공식적으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34845&categoryId=46623|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하였으며[[http://db.history.go.kr/id/ma_016_0660_0010|#]],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http://db.history.go.kr/id/npsh_1938_08_18_v0001_0080|#]] 또한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하면서 친일행적을 남겼다.[* 주로 문학인 [[이광수(소설가)|이광수]] 등이 작사한 것을 작곡해 지휘·연주하거나, 방송국에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지휘, 연주했다거나 하는것 등이었다.] 이후 1941년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2009년 11월 홍난파의 행적에 대해 수록했으나, 대통령 직속 산하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홍난파가 자의적으로 했는지 타의적으로 했는지 좀 더 따져야 한다.'면서 보류처리를 했다. 하지만 2010년 11월 홍난파의 후손이 '홍난파를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해달라'며 낸 소송을 돌연 취하함에 따라, 결국 등재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왈가왈부가 있다. 보수적인 양악계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 작품 활동은 물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며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 홍난파 뿐만 아니라 [[조두남]], [[안익태]], [[현제명]], [[이흥렬]], [[김성태(작곡가)|김성태]], [[김동진(작곡가)|김동진]]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일제강점기]]의 음악가들 상당수가 모두 친일행위를 했다. 90년대 월간 <객석>이란 클래식 음악잡지에서는 이들을 옹호하면서 "[[채동선]]은 부자라서 친일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선 생활고와 각종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굽히지 않은 예술가들을 반례로 들며 반박하는 의견 또한 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선 이미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파 99인>과 같은 여러 친일파 고발 책자에서 음악가 대표로 크게 소개되었기에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 여담 == 친일 논란 외에도 지나친 서양음악에 대한 빠심이 지적되곤 한다. 특히 조선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하며 쓴 논설에서는, 전통음악을 구닥다리라고 찍어누르고 서양음악이 우월하다고 [[자뻑]]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 이 때문에 [[국악인]]들 가운데에는 홍난파의 친일 행위와 상관없이 "[[사대주의]] 성향의 음악가였다"고 비판적으로 평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홍난파의 작품들에는 그 곡이 친일용 곡이었던 아니건 간에 대부분 (일본을 거쳐 걸러 들어온) 서양음악의 요소가 너무 짙게 배어 있는데, 어느 정도 민요 등 전통음악 요소를 접붙이기 해보려고 했던 [[안기영]]이나 [[채동선]], [[김성태(작곡가)|김성태]] 등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창가]] 등을 위시한 일본음악의 영향력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가령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인 [[고향의 봄]]의 선율 구조는 도(C) 음을 기음으로 하는 요나누키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도 있다.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250원이나 지원을 받았음에도 또 편지로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더 달라"고 부탁했고, 윤치호는 "내 아들이라도 그런 요구는 승낙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홍난파는 편지로 "조선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정당한 약탈자들이다"라고 강변했다. 또한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올 거다"라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공부하라고 돈을 보내줬더니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으면서, 돈을 더 보내주지 않는다고 나를 욕하는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홍난파를 씹었다. 단 윤치호는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다 싫어했다. 홍옥임(洪玉姙)이라는 조카[* 형 홍석후의 딸. 홍석후는 에비슨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1기생 7명 중 하나인데, [[박서양]], [[김마리아(1891)|김마리아]](1번)의 숙부인 김필순이 동기이다. 그리고, 그 에비슨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한테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를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사실 한반도의 근대 방역 전문가가 에비슨이었고, [[스페인 독감]]을 제대로 경험했을 [[유일한]]이 할 선택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 여기의 인연도 좀 더 빠를 일. 여담으로 유일한은 위의 [[윤치호]]와도 인연이 있다.]가 있었는데, 옥임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재학 중이던 1931년에 친구 김용주(金龍珠)와 동반자살을 하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바 있다. 옥임과 용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훗날 [[콩칠팔 새삼륙]]이라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922676_image2_1.jpg]] 그의 흉상은 1968년에 [[남산(서울)|남산]] [[한국방송공사|KBS]] 사옥 앞에 세워졌다가 1976년에 [[여의도]]로 이전할 때 현재의 KBS홀 자리 맞은편으로 같이 옮겨졌으나 2003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홍난파의 친일 경력을 문제삼자 KBS 측에서 자진 철수하여 2004년부터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옛 저택[* 해당 집터가 항일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https://www.minjok.or.kr/archives/82795|자택 터였다.]]]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7년 [[독립기념관]] 광복의 동산에 세워진 '홍난파 선생과 감나무'란 비석도 있었으나, 2015년에 같은 이유로 철거되어 단죄문이 설치됐다. [[단국대학교/죽전캠퍼스|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에 '난파음악관'이 있다. [[분류:화성시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토홍)]][[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ㅎ]][[분류:바이올리니스트]][[분류:지휘자]][[분류:1897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문화, 예술]][[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문화]][[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분류:성동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