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12년 출생]][[분류:1983년 사망]][[분류:스페인의 축구선수]][[분류:바스크의 축구선수]][[분류:아틀레틱 클루브/은퇴, 이적]][[분류:CA 산 로렌소/은퇴, 이적]][[분류:스페인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분류:스페인의 축구감독]][[분류:아틀레틱 클루브/역대 감독]][[분류:레알 바야돌리드 CF/역대 감독]][[분류:RC 셀타 데 비고/역대 감독]][[분류:에르쿨레스 CF/역대 감독]] [[파일:José Iraragorri.jpg]] || 이름 || 호세 이라라고리 에알로[br](José Iraragorri Ealo) || || 생년월일 || [[1912년]] [[3월 6일]] || || 사망년월일 || [[1983년]] [[4월 27일]] || || 국적 || [[파일:스페인 국기.svg|width=28]] [[스페인]] || || 출신지 || 바사우리 || || 포지션 ||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센터 포워드 || || 신체조건 || 178cm / 75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아틀레틱 클루브]] (1929-1936)'''[br]CD 우스카디 (1938-1939)[br][[CA 산 로렌소|산로렌소]] (1939-1942)[br]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1942-1946)[br]아틀레틱 클루브 (1946-1949) || || 국가대표 || 7경기 / 2골 (1931-1936) || || 감독 || [[아틀레틱 클루브]] (1949-1952)[br][[레알 바야돌리드 CF|레알 바야돌리드]] (1952-1953)[br][[RC 셀타 데 비고|셀타 데비고]] (1953)[br][[에르쿨레스 CF|에르쿨레스]] (1955-1956)[br]SD 인다우추 (1959-1960)[br]SD 인다우추 (1962-1963) || [목차]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어린 시절 === 이라라고리의 어린 시절은 다소 불우했다. 그의 아버지는 운전일을 했는데 이라라고리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사망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이라라고리는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교에서 축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 축구 선수 === ==== 클럽 ==== 어린 시절에 이라라고리는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하며 체력을 키웠고 16살의 나이에 [[아틀레틱 클루브]]의 1군에 속할 정도로 축구에 재능 있는 소년이 되었다. 이라라고리는 1930년 1월 5일에 바스크 라이벌 [[레알 우니온]]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아틀레틱 클루브는 말 그대로 [[리즈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1929-30 시즌의 [[무패 우승]][* 18전 12승 6무. [[라리가]] 최초의 무패 우승 기록이기도 하다.]을 포함한 2년 연속 [[더블#S-7|더블]]을 기록하며 7시즌 동안 [[라리가|리그]] 우승 4회, [[코파 델 레이]] 우승 4회라는 위엄 넘치는 성적을 찍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이 터졌고 이라라고리 역시 다른 팀 동료들과 함께 유럽 각지로 투어를 떠났다. 결국 그들은 [[멕시코]]까지 건너가서 1938-39 시즌에 [[리가 MX|프리메라 푸에르사]]에 CD 우스카디(Uzkadi)라는 팀으로 참가했고 시즌이 끝난 후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라라고리의 행선지는 [[아르헨티나]]였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이라라고리는 의 [[CA 산 로렌소]] 소속으로 [[수페르리가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무대를 누볐고 이 시기에 팀은 2차례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1942년부터 이라라고리는 1946년까지 [[레오나르도 실라우렌]], [[이시드로 랑가라]]와 함께 멕시코의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에서 뛰었고 1946년에 [[빌바오]]로 다시 돌아가 1949년까지 선수로 뛰었다.[* 첫 시즌을 빼면 이라라고리는 빌바오의 선수로 많은 경기를 뛰지 않았고 이 시기에 바라칼도의 감독을 맡았다고도 한다.]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이라라고리의 첫 스페인 대표팀 경기는 1931년 4월 19일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전이었고 [[루이스 레게이로]]의 부상으로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 이 경기는 0대0으로 비겼다. 이라라고리는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월드컵]]에서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라운드#s-1.2|스페인의]]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8강 이후#s-1.1|2경기에]] 참가했다. 그는 특히 1라운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전에서 [[페널티 킥]]을 포함 2골을 기록했고[* 이라라고리의 페널티 킥 득점은 스페인의 [[FIFA 월드컵]] 본선 첫 득점이다. 그리고 25분에 기록된 이라라고리의 두 번째 득점은 [[이시드로 랑가라]]의 득점이라는 기록도 있다.] 스페인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8강전 재경기에는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이라라고리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36년 2월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전이었고 스페인은 독일에 1대2로 패했다. 이라라고리는 총 7경기 출전, 2골의 스페인 대표팀 기록을 남겼다. === 감독 === 1949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이라라고리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자마자 친정팀 [[아틀레틱 클루브]]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감독이 된 첫 해 빌바오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고 1951-52 시즌엔 [[라리가]] 준우승도 이루었다. 그는 빌바오에서 총 103경기 중 54경기를 승리했다. 하지만 이라라고리는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아틀레틱 클루브의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레알 바야돌리드 CF|레알 바야돌리드]], [[RC 셀타 데 비고|셀타 비고]], [[에르쿨레스 CF|에르쿨레스]], 인다우추의 감독을 맡았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기술이 빼어났고 축구 지능이 좋은 포워드였다. 그러면서 피지컬과 힘도 좋았다고 한다.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경기당 0.77골을 기록할 정도로 득점력도 좋았다. == 사생활 == * 이라라고리의 형 빅토르는 과학과 수학에 재능을 보였고 이라라고리도 원래는 [[회계사]]를 준비했지만 축구로 크게 성공해서 계획을 접었다. * 이라라고리는 [[만혼|1960년에 결혼]]했고 슬하에 두 아이를 두었다. == 수상 == === 클럽 === * [[라리가]] 우승 4회: 1929–30, 1930–31, 1933–34, 1935–36([[아틀레틱 클루브]]) * [[코파 델 레이]] 우승 4회: 1929-30, 1930-31, 1931-32, 1932-33(아틀레틱 클루브) * 라리가 준우승 3회: 1931–32, 1932–33, 1946–47(아틀레틱 클루브) * [[리가 MX|프리메라 푸에르사]] 준우승 1회: 1938-39(CD 우스카디) * [[수페르리가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41, 1942([[CA 산 로렌소|산 로렌소]]) * 바스크 지역 리그 우승 4회: 1930-31, 1931–32, 1932–33, 1933–34(아틀레틱 클루브) * 코파 바스카 우승 1회: 1934-35(아틀레틱 클루브) * 바스크 지역 리그 준우승 1회: 1929-30(아틀레틱 클루브) === 감독 === *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1949–50 * 스페인 로얄 페더레이션 컵 우승 1회: 1952-53([[레알 바야돌리드 CF|레알 바야돌리드]]) * 라리가 준우승 1회: 1951–52(아틀레틱 클루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