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 瓠公(호공) / 瓠(호)(?) || || '''시대''' || 한국 [[삼국시대]]의 인물 || || '''출생''' || 기원전 20년 이전 ~ 기원후 58년 이후 || || '''국적''' || [[일본]] → [[신라]][* 일본에서 신라로 [[망명]]/[[귀화]]] || [[왜국]] 출신의 [[신라]] 초기의 [[재상]]. 어찌보면 [[위만]]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귀화]]인 일지도. 초기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 왜국이라는 출신은 보통 일본 열도에서 온 일본인으로 해석되지만 진짜 [[일본 열도]] 출신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해상세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으로 불렸다고 한다. 일부에선 호공에 호가 박을 뜻하는 호이기 때문에 [[박씨]]족의 분파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으나, 호공이 박씨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서는 한곳도 없으며 애초에 박은 한자 그대로 박이 아닌 밝-의 음차인데다가, 박씨의 시조 혁거세와 같은 시대 인물로 묘사되는데다 두 사람의 출신기록이 혁거세는 [[난생설화]][* 현실적으로 해석해보려는 경우에도 보통 신라 건국집단을 북쪽에서 남하한 세력으로 연관지어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호공은 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설득력은 떨어지는 편. 오히려 기반이 동일한 이씨일 가능성이 더 높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혁거세 거서간]] 때로, '혁거세왕 38년([[기원전]] 20년) 2월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마한왕]]의 오만함을 꾸짖는다.' 이는 신라(사로국)의 국력이 옛날보다 신장했다는것을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대로 보면 상대적으로 마한의 국력이 약해졌음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후 [[탈해 이사금]]의 속임수로 집을 빼앗기는 굴욕을 겪는다. 석탈해가 호공의 집터가 좋은 것을 보고, 미리 [[숯]]과 [[숫돌]]을 몰래 묻어둔 뒤 호공에게 찾아가 자신의 집안은 원래 [[대장장이]]인데 잠시 다른 곳에 간 것이라 주장하고 땅을 파면 숯과 숫돌이 나온다고 말하고 한번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숯과 숫돌이 나오자 이를 근거로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안습]]-- 삼국유사에 따르면 훗날 이 집터에 석탈해가 신라의 왕궁이 될 [[경주 월성]]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주변보다 땅이 높은 언덕 위고 강줄기도 가까워 집터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 동화책이나 위인전등의 판본에서는 이후 석탈해가 왕이 된후에 호공에게 다른 집을 선물했다고도 하며, [[석탈해]]가 [[호공]]의 집을 일방적으로 뺏은 게 아닌, 역시 외국 출신이었던 석탈해가 [[신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호공의 집에서 살면서 그와 제휴를 맺은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계림]](당시는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자 탈해왕의 명을 받고 [[김알지]]를 주워온 것도 호공이다. [[재상]]으로서 왕의 명령을 받고 나라 밖의 일을 도맡았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장수왕]]급으로 [[장수]]한 인물인데, 마한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원전 20년에 최소한 10대 중후반(당시는 활동하는 나이가 현재보다 확실히 낮았기 때문에)이라고 가정하면 마지막 기록인 기원후 58년 대보에 임명된 시점엔 80살에 육박한다. 한편, 그의 거주지였던 양산(楊山)[* 오늘날의 [[양산시]]가 아니라, 사로 6촌 중 하나이다.]에는 표암봉(瓢嵒峰)이라는 곳이 있는데, 표(瓢)가 호(瓠)와 자형이 비슷하고 뜻이 '''박'''으로 같기 때문에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일단 신라 시조 3명의 탄생에 모두 관여하고, 무엇보다 그의 집터가 훗날 '''[[경주 월성|월성]](月城)'''으로 발전되었다고 전하는 만큼 초기 신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각주] [[분류:신라의 인물]][[분류:일본계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