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옹주]][[분류:1514년 출생]][[분류:1580년 사망]] [include(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4153e 0%, #94153e 20%, #94153e 80%, #94153e)" '''{{{#ffd400 조선 중종의 왕녀[br]{{{+1 혜정옹주 | 惠靜翁主 }}}}}}'''}}} || ||<width=50><bgcolor=#94153e> '''{{{#gold 이름}}}''' ||<-2>석환(石環)[* 선원록에 기재되어 있다. ] || ||<bgcolor=#94153e> '''{{{#gold 출생}}}''' ||<-2>[[1514년]]^^([[중종(조선)|중종]] 9년)^^ || ||<bgcolor=#94153e> '''{{{#gold 사망}}}''' ||<-2>[[1580년]]^^([[하성군|선조]] 13년)^^ [br]{{{-2 (향년 67세)}}} || ||<width=50><bgcolor=#94153e> '''{{{#gold 부왕}}}''' ||<-2>[[중종(조선)|중종]] || ||<width=50><bgcolor=#94153e> '''{{{#gold 생모}}}''' ||<-2>[[경빈 박씨]] || ||<width=50><bgcolor=#94153e> '''{{{#gold 부군}}}''' ||<-2>당성위 홍여[*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이다. ] || ||<width=50><bgcolor=#94153e> '''{{{#gold 자녀}}}''' ||<-2>1녀 ^^(장녀)^^ 윤호의 처[*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의 손자이자 윤흥인의 아들이 윤호다. ] || ||<width=50><bgcolor=#94153c> '''{{{#gold 묘소}}}''' ||<-2>[include(틀:지도, 장소=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307-1, 너비=100%)]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307-1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종]]의 서2녀. 어머니 [[경빈 박씨]]의 차녀로, 오빠 [[복성군]]과 [[혜순옹주]]와 [[동복형제|동복]] 남매 지간이 된다. == 생애 == 1525년(중종 20) 판결사 홍서주[* 홍서주의 아버지 홍숙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이 된 인물이다. ]의 아들 홍여와 가례를 올렸는데, 남편인 홍여는 당성위에 봉해졌다. 중종은 혜정옹주가 출합할 때를 고려하여 옹주의 집을 지어주려고 하였는데, 집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럽다고 신하들이 상소하였다. 이에 중종은 "지금 혜정 옹주의 집은 단지 70간으로 비록 제도보다 지나친 듯하나 반드시 용도를 헤아려 지었을 것이니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중종실록 47권, 중종 18년 4월 25일 병신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804025_004|#]] ] --나중에 [[효종(조선)|효종]]이랑 [[현종(조선)|현종]]이 공주 집 지어주는거 보면 70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1527년(중종22) [[작서의 변]]이 일어나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경상도]] [[상주]] 지방으로 유배를 갔고[* 경빈 박씨의 아버지 박수림이 상주 지방의 사족이었으므로 고향으로 내려보낸 것이다. ], 옹주의 남편 홍여는 경빈 박씨의 사주로 [[인종(조선)|세자]]를 저주하는 익명의 글을 썼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1533년(중종 28)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다시 의심 받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홍여는 소년이었는데, 형장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 5월 26일 무진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805026_003|#]] ] 나중에야 일의 진상이 밝혀지고, 당시 옥사를 맡았던 [[김안로]]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간다. >그 옥사를 추국할 적에 김안로가 추관(推官)이었는데, 홍여의 집안으로 죄를 돌리고자 하여 이는 작서(灼鼠)의 사건과 유사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며, 그 집의 노비(奴婢)들이 무수하게 형장을 받고 그가 묻는 대로 자복(自服)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 32년 11월 26일 그리고 1541년(중종 36) [[인종(조선)|세자]]가 복성군의 딸[* 복성군이 군부인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나중에 유학 최예수와 혼인한다. ]과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하면서, 옹주의 직첩을 돌려받고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