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현준혁}}}'''[br]'''玄俊赫'''}}}}}} || ||<-2> [[파일:현준혁.png]][br][* 1936년 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大砲黃成 || || '''이명''' ||황욱(黃郁)[* [[http://db.history.go.kr/id/ma_016_0490_0150|#]]] || || '''본관''' ||[[연주 현씨]] || ||<|2><width=80> '''출생''' ||[[1906년]] [[5월 15일]][* [[http://db.history.go.kr/id/ia_6087_4716|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3년생, [[http://db.history.go.kr/id/ia_6088_4716|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4년 3월 13일로 기재되어 있다.] ||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등리[br](현 평안남도 [[개천시]] 천리길동) || ||<|2> '''사망''' ||[[1945년]] [[9월 3일]] || ||평안남도 [[평양직할시|평양부]][br](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중성동 김일성광장 부근)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북쪽 지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06년]],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등리(현 개천시 천리길동)의 빈농가[[http://db.history.go.kr/id/ia_6087_4716|#]]에서 태어났다.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협성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와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졸업 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경북대학교/학부/사범대학|대구사범학교]]에서 교유(敎諭)로 심리학, 영어, 한문, 교육사 등을 가르쳤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3&totalCount=3&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7%8E%84%E4%BF%8A%E8%B5%AB&brokerPagingInfo=&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8E%84%E4%BF%8A%E8%B5%AB&searchKeywordConjunction=AND|#]].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지도했다. 그러나 1932년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그해 12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나 학교를 떠나야 했다[[http://db.history.go.kr/id/su_010_1932_12_02_0110|#]][* 현준혁이 체포되던 해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중 한 명이 [[박정희]]다. 현준혁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후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을 찾아 읽게 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현준혁은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 기자로 근무하면서 1933년 8월부터 개천·[[영변군|영변]]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적색노동조합 조직 준비 운동 및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5년 4월 또 다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36년 2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http://db.history.go.kr/id/had_194_0670|#]][[http://db.history.go.kr/id/ia_6088_4716|#2]]. [[1939년]] 6월 30일 출옥한[[http://db.history.go.kr/id/ia_6088_4716|#]] 이후에는 한동안 고향에서 은신했다. ||<tablealign=center> [[파일:현준혁(1935년 투옥).png|width=70%]] || || 1935년 4월 24일, 적색농·노조 조직 준비 혐의로 검거될 당시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과 접촉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를 결성하고 서기에 취임한다. [[8월 27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출범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 [[조만식]]과 함께 위원회를 이끈다. 당시 현준혁은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민족진영에도 환영받을 수 있는 유력인사였다. 그러나 [[9월 3일]] 평안남도 평양부(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중성동 김일성광장 부근)에서 [[조만식]]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차에 달려든 괴한에게 암살됐다.[* 9월 28일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묘비와 여러 증언을 종합할 때 3일에 암살됐다고 보는 편이 조금 더 유력하다.] 광복된 이후에 벌어진 최초의 정치 테러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이 이후로 이북의 공산주의 세력의 주도권을 잡은 이는 [[김용범]]의 지지를 받는 김일성이었다. 현준혁 암살범에 관해 정설은 [[백의사]] 단원이 저질렀다는 설 이며, 다른 설로 이북 내부의 권력 다툼 과정 속에서 다른 사회주의자 파벌이 보낸 사람이 저질렀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미 당시 [[소련군정]] 비밀 문서에 백의사 등 극우 조직에서 보낸 사람이 현준혁을 암살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등 백의사나 그 비슷한 성향의 극우 측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한편, 자신이 백의사 단원이었다고 주장하는 백근옥은 자신의 동생인 [[백관옥]]이 현준혁의 암살범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 기타 ==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1906년 출생]][[분류:개천시 출신 인물]][[분류:연주 현씨]][[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출신]][[분류:중동고등학교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한국의 사회주의자]][[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1945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한국사]][[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