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이학 교수]][[분류:실향민]][[분류:1912년 출생]][[분류:1986년 사망]][[분류:안주시 출신 인물]][[분류:연주 현씨]] [[분류:휘문고등학교 출신]][[분류:규슈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 [[파일:현신규.jpg]] 玄信圭 [[1912년]][* [[http://db.history.go.kr/id/im_114_30227|대한민국인물연감]]에는 191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1986년]] [목차] == 개요 == 본관은 [[현(성씨)|연주]](延州), 호는 향산(香山). 대한민국의 임목육종학자로 한국 임학의 대부이자 [[녹화사업|산림녹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대표적 업적은 리기테다소나무와 은수원사시나무(현사시나무)의 육종을 통해 산림녹화의 초석을 다지고 한국 [[육종|육종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것이다. == 생애 == 1912년 [[평안남도]] [[안주시|안주군]]에서 안주군수였던 현도철(玄道徹)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릿쿄대학]] 철학과에 유학을 다녀온 형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철학자를 꿈꾸었다. [[휘문고등학교|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고 일본 야마구치(山口)[[구제고등학교|고등학교]][* 중등교육기관인 현재의 [[고등학교]]와는 다르다. [[구제고등학교]] 참조]에 입학원서를 내기도 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지시로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으로 당시는 대학이 아닌 [[구제전문학교|전문학교]]였다.]에 입학했다. 꿈이 좌절되어 1년간 방황하던 그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종교가인 [[우치무라 칸조]](內寸鑑三)의 전집을 읽다가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글[*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을 읽은 것을 계기로 임업이라는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수원고농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정희섭]]의 재정적 도움으로 [[규슈대학|규슈제국대학]] 임학과에 진학하였고, 1936년 졸업하면서 당시 조선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1937년부터 기수로 정식 직원이 되었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5&totalCount=5&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D%98%84%EC%8B%A0%EA%B7%9C&brokerPagingInfo=&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98%84%EC%8B%A0%EA%B7%9C&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이곳에 근무중 50여명의 학자로 구성된 조사대의 일원으로 [[백두산]] 생태조사에 참여하였다. 1943년 [[규슈대학|규슈제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연구 중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농림전문학교]]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임업시험장을 재건하였고, 수원농전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규슈대학]]에서 수행했던 연구 결과를 틈틈이 지도교수였던 사토(佐藤敬二) 교수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학위논문으로 인정되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임업 분야 제1호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1951년 미 정부의 전후 재건 계획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 파견되어 산림유전학을 연구하였다. 1963년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하였다. == 연구 == === 포플러 개량 === 포플러는 빨리 자라 헐벗은 산야를 녹화하는데 적합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태리포플러를 도입하여 한국의 기후 풍토에 맞는 품종을 찾아 전국에 보급하였다. === 리기테다소나무 === 미국 원산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새로운 잡종인 리기테다소나무를 만들어 1962년 미국 학회지에 소개되었다. 리기다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지만 생장속도가 느리고 가지가 구불구불하며 [[송진]]이 많고 재질이 좋지 않았다. 테다소나무는 곧게 자라고 재질이 좋고 생장속도가 빨랐으나 추위에 약하고 비옥한 땅에서만 자랐다. 이 잡종소나무는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빨리 자라고 곧게 자라며 추위에도 강했다. 이 나무는 유럽의 잡종낙엽송과 에테뉴 라디아타소나무에 이어 교잡육종에 성공한 세계에서 세 번째 사례로 꼽혀 국제적으로 소개되었으며 미국 산림국이 이 품종을 미 북부 탄광지역에 심어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특히 1962년 미국이 對한국 원조를 삭감하려 하자 리기테다소나무가 대한 원조의 대표적인 성과로 제시되어 삭감안을 부결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개화 시기가 달라 자연적인 잡종 교배가 불가능하여[* 작은 관목도 아니고, 키가 큰 소나무 상층부에 있는 수꽃과 암꽃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수분시켜야 한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교잡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종자 생산 효율이 좋지 않아 녹화사업 당시에도 많이 식재되지 못하였다.[* 약 6000만 본이 식재되었는데, 많은 양처럼 보이지만 1차, 2차 치산녹화 사업 통틀어 약 50~60억 그루의 묘목이 식재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다.] 산림녹화가 완료된 현재는 힘들게 리기테다소나무의 종자를 생산할 이유가 없으므로 추가로 심고 있지 않고 있다. === 은수원사시나무 === 유럽 원산의 은백양과 한국 원산의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은수원사시나무를 만들었다. 이 나무는 평지 뿐 아니라 산지에서도 잘 자라 1973년 치산녹화10개년계획에 따라 전국에 대량으로 심어졌으며, 1979년 [[박정희]]대통령의 권유로 육종을 한 현신규 박사의 성을 붙여 현사시나무라고도 명명하였다. 국내 뿐만 아니라 포퓰러나무의 나무녹병으로 골머리를 앓던 뉴질랜드에서도 1976년부터 이 나무를 대거 수입해 전국적으로 심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 나무를 수원사시나무의 서식지였던 수원 여기산의 이름을 따 'Yeogi'라고 부른다. == 자녀 == * 장녀 현신애: [[서울대학교/학부#s-2.12|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졸업(생화학). 전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 장남 현정향: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활동. * 차녀 현정춘: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졸업. * 차남 현정오: 서울대학교 농생물학과 졸업.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임학박사. 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 삼남 현요한: 서울대학교 응용물리학과 중퇴. [[장로회신학대학교|장로회신학대학]] 졸업.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박사. 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자식농사끝판왕~~ == 평가 == 흔히 리기테다 소나무의 육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 외에도 1호 임학박사로서 서울대 교수직을 맡아 수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고 신품종의 육종, 종자의 채취 보관, 정책 수립 측면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과학 명예의 전당과 임업 명예의 전당에 모두 올려진 유일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