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부통령)] [include(틀:역대 감사원장)] ||<-2><tablewidth=420><:><table align=right>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table bordercolor=#005ba6><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67F 0%, #005BA6 20%, #005BA6 80%, #00467F)" '''[[대한민국 부통령|{{{#FFC224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br]{{{#ffc224 {{{+1 함태영}}}[br]咸台永 | Ham Tae-young}}}'''}}}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함태영 (1).png|width=100%]]}}} || ||<|2><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width=100> '''출생''' ||[[1873년]] [[10월 22일]]|| ||[[함경도]] [[무산군]] 무산읍[[http://db.history.go.kr/id/ia_5983_4640|#]]|| ||<|2> '''사망''' ||[[1964년]] [[10월 24일]] (91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1가 396[br](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 '''묘역'''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3묘역-116|| ||<|2>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2><:><bgcolor=#fff,#1F2023><color=#373a3c,#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 width=100%><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함(성씨)|강릉 함씨]] || || '''부모''' ||[[아버지]] 함우택, [[어머니]] 원주 변씨 || || '''배우자''' ||밀양 손씨(사별)[* 아들 병철, 병승만 낳았다. ][br]진주 최씨(사별)[* 병창만 낳고 죽었다. ][br]고숙원(삼혼)[* 나머지 자녀들의 생모 ] || || '''자녀''' ||함병철^^(1889 ~ 1947)^^[br]함병승^^(1896 ~ 1956)^^[br]함병창^^(1907 ~ ?)^^[br]함병욱^^(1911 ~ 1930)^^[br]함병조^^(1913 ~ 1966)^^[br]함병호^^(1923 ~ 1940)^^[br]함병돈^^(1925 ~ 1986)^^[br]함요한^^(요절)^^[br]함병소^^(1928년생)^^[br][[함병춘]]^^(1932 ~ 1983)^^ || || '''학력''' ||[[서울대학교 로스쿨|법관양성소]] {{{-2 (졸업)}}}[br][[평양신학교]] {{{-2 (졸업)}}}[br][[중앙대학교]] {{{-2 (법학 / 명예박사)}}} || || '''종교''' ||[[개신교]] {{{-2 ([[한국기독교장로회]])}}} || || '''신체''' ||약 167cm[* [[파일:2015072100314_0.jpg|width=150]] 이 사진을 보면(오른쪽의 인물이 함태영이고 왼쪽의 인물이 이승만이다.) 165cm였던 이승만보다 약간 작은 키로 추측할 수 있다. 그래도 19세기 출생임을 감안한다면 이승만과 함태영 모두 작은 키는 결코 아니다. ] || || '''자''' ||자경(子卿) || || '''호''' ||송암(松岩) ||}}}}}}}}}|| [목차] ||<width=6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f3e642657b050ec9ec3ca6b032d8753.jpg|width=100%]]}}} ||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공화국|대한민국]]의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장과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후 [[국민장]]이 거행되었으며,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묘소는 [[2004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애국지사 제3묘역-116)으로 이장되었다. == 일생 == ||<width=4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esterday_pix_2_ydCAAb08_R.png|width=100%]]}}} || ||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 당시 함태영.[br][[http://www.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SrcGBN=BK&photo_PhotoID=2&detl_PhotoDTL=134&gbn=KM|e영상역사관 정부기록사진집 제3대 민의원 선거(5).]] || 1873년 [[함경북도]] [[무산군|무산]]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과 가문의 300여년간의 세거지는 [[전라북도]] [[김제시|김제]]라 그를 김제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http://town.gimje.go.kr/index.gimje?menuCd=DOM_000001610002001008|출처]] 이후 부친이 50대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을 시작하면서 그도 고향인 김제에서 [[서울특별시|한양]]으로 상경하였다. 1895년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듬해 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열사)|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20대에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김홍륙|김홍륙의 고종 순종 독살 미수 사건]]에서 김홍륙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서 그를 무죄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민씨척족으로 부터 김홍륙을 역모로 다스리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고종의 외압으로 인해서 다른 판사로 교체되었다. 1898년 10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함태영은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하였는데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으니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로도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직, 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법복을 벗어던지고 사인으로 돌아갔다. 1912년 4월 1일 일제는 그를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복직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이에 불응하여 휴직하고 같은 해 7월 21일자로 퇴직하여 일제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저항했다.[[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4419|#]] 이후, [[개신교]]에 귀의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개신교 세력을 이끌고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3.1 운동]]의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신대학교]] 총장과 이사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장을 지냈다. 1952년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만기 재임하였다. 4명의 부통령들 중 유일하게 임기를 온전히 채운 부통령이다.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권유한 이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처음에는 고령을 이유로 고사했지만 계속되는 부탁에 결국 수락하고 출마한 것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1964년 별세하였다. == 가족 관계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한 [[함병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그의 막내아들이다. [[함인섭]] 전 농림부장관이 맏손자이다. --함병춘 전 실장이 1937년생, 함인섭 전 장관이 1907년생인데 아들뻘 되는 사람한테 막내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 == 여담 == * 제국 개창도 전인 조선에서 벼슬길에 올라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부통령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굉장히 젊은 나이에 소년등과하여 91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 손녀가 되는 [[이화여자대학교]] 함정혜 교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이화여자대학교 정유라 특혜 논란|이화여대에서의 특혜 논란]]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정유라]]에게 학사경고, 제적을 공지했다가 압력으로 지도교수 자리에서 밀려난 상태다. 함씨 가문이 [[연세대]]와 [[이화여대]], [[현대그룹]]까지 연결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정유라]] 참조. [각주]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 부통령]][[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종교인 출신 정치인]][[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분류:대한민국의 목사]][[분류:무산군 출신 인물]][[분류: 강릉 함씨]][[분류:1873년 출생]][[분류:1964년 사망]][[분류:감사원장]][[분류:실향민]][[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총신대학교 출신]][[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이승만 정부/인사]][[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