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청주 한씨]][[분류:정읍시 출신 인물]][[분류:1875년 출생]][[분류:191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한흥삼.jpg|width=300px]] || || 성명 ||한흥삼(韓興三) || || 이명 ||배량(裵粱) || || 본관 ||[[청주 한씨]] || || 생몰 ||[[1875년]] [[10월 15일]] ~ [[1912년]] [[7월 11일]] || || [[출생지]] ||전라도 태인현 옹지면 제내리[br](현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일리마을)[*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한흥삼은 전라도 태인현 옹지면 제내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일리마을)에서 태어났다. 20살 때인 1894년 1월,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전주시|전주]]를 거쳐 [[삼례읍|삼례]]까지 진출하였으나 일본군에게 패하자, 귀향하지 못하고 피신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음력 4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정읍시|정읍]], [[순창군|순창]] 등에서 활약한 바 있다.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의 해산 후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임실군]] 출신의 의병장 정성현(鄭成玄)이 부하 30여명과 함께 총 20정, 칼 1자루를 휴대하고 항일활동을 한다는 사정을 전해 듣고 가산을 팔아 총기, 병기 등을 다수 구입하여 1909년 음력 2월 10일, 정성현 의진에 가담하였다. 이 부대에서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1195|양운경]](梁雲京)·[[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0539|김윤오]](金允五)·[[김낙필]]·[[김기만(1881)|김기만]]·[[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7298|이홍길]](李弘吉)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시|김제군]]의 각 촌리를 전전하며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전투를 계속 수행하면서 김제군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던 중, 1909년 8월 중순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97&evntId=0034989568&evntdowngbn=Y&indpnId=000002072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2년 7월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출옥 직후인 7월 11일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