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청주 한씨]][[분류:신흥군 출신 인물]][[분류:1888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한흥.jpg|width=300px]] || || 성명 ||한흥(韓興) || || 일본식 성명 ||日仙俊炯 || || 족보명 ||한준형(韓俊炯) || || 본관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 24세.] || || 생몰 ||[[1888년]] [[12월 11일]][* 청주 한씨 제7교 대동족보에는 10월 1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1960년]] [[12월 5일]] || || [[출생지]] ||[[함경도]] [[함흥시|함흥부]] 가평면 중상리[* 인근의 능리·장풍리·풍상리와 함께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br](현 [[함경남도]] [[영광군(함경남도)|영광군]] 중상리)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한흥은 1888년 12월 11일 함경도 함흥부 가평면 중상리(현 함경남도 영광군 중상리)에서 아버지 한섭용(韓燮容)과 어머니 [[유(성씨)|강릉 유씨]] 유영신(劉永臣)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 권업신문사(勸業新聞社) 통신원을 역임했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이동녕]], [[신규식]], [[여준(독립운동가)|여준]], [[이범윤]], [[이상룡]], [[박은식]], 허혁(許爀)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20년에는 왕청, 혼춘, 동녕, 영안, 목릉 일대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서기로서 김병하(金炳河)·김헌(金憲)·조봉(趙封) 등과 함께 활약했다. 또한 군자금 모집 차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6월 베이징으로 망명한 그는 선두자사(先頭者社)의 동인(同人)으로 조남승(趙南升)·[[원세훈]]·[[서왈보]]·[[박건병]]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중국국민과 함께 구국구족(救國救族)을 위하여 협력하자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9년 귀국한 그는 그해 8월 함흥중앙학원(咸興中央學院) 및 유치원을 설립, 경영하였고, 1931년 2월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를 설립, 부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전념했다. 1938년 4월에는 함흥대흥상업학원(咸興大興商業學院)을 창립하여 경영하였고, 1942년 6월에는 함흥대동학원(咸興大東學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숙명여자실업학원(淑明女子實業學院)의 원장에 취임했다. [[8.15 광복]] 후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월남했고, 1960년 12월 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