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명이인/ㅎ]] [목차] == 홍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한필동 ==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한필동.jpg|width=300px]] || || 성명 ||한필동(韓弼東) || || 본관 ||[[청주 한씨]][* 공안공파 32세 동(東) 항렬.] || || 생몰 ||[[1921년]] [[1월 20일]] ~ [[1993년]] [[1월 14일]] || || [[출생지]]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홍성)|금마면]] 부평리 || || 사망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한필동은 1921년 1월 20일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부평리에서 아버지 한철유(韓哲裕)와 독립유공자인 어머니 [[청주 한씨]] [[유예도]]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유관순]] 열사의 사촌 언니로, 1919년 [[경성부]] [[파고다공원]]과 [[천안시|천안군]] 아우내 장터에서 열린 [[3.1 운동]]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바 있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31900329207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3-19&officeId=00032&pageNo=7&printNo=9684&publishType=00020|#]] 출생 이후 큰아버지인 한서우(韓瑞禹)에 입양되었다. 그는 1944년경 학병으로 징집되어 창사의 일본군 제64부대 소속 중국군 포로 감시병으로 근무하다가 탈출했고, 1945년 충칭에 소재한 대한광복군 총사령부로 후송된 뒤 토교대(土橋隊)에 배속되어 임정 요인의 호위,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공작수행 등을 전개했다. 그러다 [[8.15 광복]]을 맞이한 후 육군 헌병 CID부대장을 맡았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생활하다 1993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필동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 광복군/군인]][[분류:홍성군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1921년 출생]][[분류:199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 합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한필동 == || 성명 ||한필동(韓弼東) || || 자 ||열경(說卿) || || 본관 ||[[청주 한씨]][* 문정공파 29세 동(東) 항렬.] || || 생몰 ||[[1888년]] [[1월 26일]] ~ [[1952년]] [[11월 18일]] || || [[출생지]] ||[[경상도]] 삼가현 중촌면 덕촌리[br](현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 || 사망지 ||[[경상남도]] [[합천군]] || || 추서 ||대통령표창 || 한필동은 1888년 1월 26일 경상도 삼가현 중촌면 덕촌리(현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에서 아버지 한익원(韓翊源)과 어머니 [[함안 조씨]] 조용하(趙鏞夏)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합천군 삼가면에 거주하던 중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친구 윤규현(尹圭鉉)으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받고 즉각 수락했다. 이후 그는 각 면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연락을 취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했다. 1919년 3월 3일 오후 1시경 삼가 시장으로 나가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군중을 격려하였다. 수많은 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합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2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한필동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분류:합천군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1888년 출생]][[분류:1952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