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6년 출생]][[분류:홍원군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오산고등학교(서울)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와세다대학 출신]][[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분류:193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한위건.jpg|width=300px]] || || 성명 ||한위건(韓偉健) || || 이명 ||이철악(李鐵岳)·이영식(李永植)[br]한광우(韓光宇)·이광우(李光宇)·이철부(李鐵夫) || || 본관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 27세. 족보명은 한위건(韓偉'''鍵''').] || || 생몰 ||[[1896년]][* [[http://db.history.go.kr/id/im_114_10071|용의조선인명부]]에는 1900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1937년]] || ||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동촌리[*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br](현 함경남도 [[신포시]] 신풍리)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항일운동가.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자.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한위건은 1896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동촌리(현 신포시 신풍리)에서 아버지 한효순(韓孝淳)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기하(姜璣夏)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의 용원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경성부]]로 이주하여 간동(현 [[종로구]] 사간동)에 거주했다.[[http://db.history.go.kr/id/im_114_00253|#]]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학부/의과대학|경성관립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대표로서 만세운동을 위해 종교단측과 연합전선 형성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는 등 만세시위에 앞장서 나갔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체포망을 피한 그는 서울에서 생겨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곧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 임시의정원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여운형]]의 일본 방문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면서,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발간하던 주간신문『신대한(新大韓)』발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0년 잠시 귀국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당시인 1923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에 참가하여 위원·총무 등을 맡았으며 국내 순회강연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YMCA|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4년 1월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재동경조선인대회 명의로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한 뒤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 등 사회단체에 가입하면서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공감해 오던 사회주의 사상의 실천을 위해 1926년 11월 [[정우회(1926)|정우회]]에 가입하여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2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 발기에 참가하여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잡지『계급투쟁』을 발간하면서 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이철부(李鐵夫)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학생공산당(學生共産黨)·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베이핑]]시 당부위원회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인 1932년 7월 21일 대구지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은 기록이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6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025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형사사건부]]에 남아 있다. 1933년 한때 [[중국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중국공산당]] [[허베이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노선상의 차이로 [[중국공산당]]과 잠깐동안 단절한 뒤에도 1935년 12월 [[톈진]]에서 항일집회 및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6년 봄 [[중국공산당]] 북방국(北方局) 서기 [[류사오치]]에 의해 허베이성위원회 서기 겸 톈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1937년 5월 [[옌안]]에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대회가 열릴 때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당대표대회가 끝난 후 옌안 요양소에서 별세했다. == 기타 ==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한위건을 비롯해 [[오복원]]·김중화·[[나창헌]]·이의경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3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