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Hanseolya.png|width=300]] 韓雪野 [[1900년]] [[8월 3일]] ~ [[1976년]]? [목차] == 개요 == [[북한]]의 정치인 겸 문학가.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 예빈윤공파 23세 병(秉) 항렬. 일부 자료에서는 본관을 안변이라고 하는데,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를 후손들 중 안변 한씨로 칭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나[[http://han-yebinyoon.kr/pages/page_94.php|#]], 한설야의 15대조 한익지(韓翼之)의 1486년([[성종(조선)|성종]] 17) 생원시 급제 당시 사마방목을 보면 당시 이미 본관을 청주(淸州)로 환원했음을 알 수 있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486_000932&curSetPos=0&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https://www.aladin.co.kr/author/wauthor_overview.aspx?AuthorSearch=@50344|#]]이며 본명은 한병도(韓秉道)이다. 한설야 이외에도 설야(雪野)·만년설(萬年雪)·한형종(韓炯宗)·김덕혜(金德惠)·윤영순(尹英順)·H생 등의 필명을 사용한 바 있다. == 생애 == 1900년 8월 3일 [[함경남도]] [[함흥시|함흥군]] 주서면 하구리[*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http://www.yes24.com/Product/Goods/6495675|#]](현 [[함주군]] 주서리)에서 1894년([[고종(대한제국)|고종]] 31) 진사시에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39746&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삼수군]]수를 지낸 바 있는 지주 한직연(韓稷淵:1863.4.1 ~ 1926)과 [[전주 이씨]] 이병호(李炳浩)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로 대대로 [[함흥]] 인근에 세거하였는데, 직계 10대조 이후로 1대도 거르지 않고 벼슬을 했을 정도로 명문가였다.[* 10대조 한곽(韓廓) [[선원전]][[참봉]] - 9대조 한기천(韓紀千) 1663년([[현종(조선)|현종]] 4) 진사시/1675년([[숙종(조선)|숙종]] 1) 문과/[[사헌부]]감찰 - 8대조 한재원(韓在垣) 1682년([[숙종(조선)|숙종]] 8) 진사시/1702년([[숙종(조선)|숙종]] 28) 문과/[[순천시|순천]][[부사#s-3|부사]] - 7대조 한석건(韓錫健) [[참봉]] - 6대조 한종제(韓宗濟) 1733년([[영조]] 9) 문과/부총관 - 5대조 한백림(韓栢林) 1777년([[정조(조선)|정조]] 1) 생원시/[[서흥군|서흥]][[부사#s-3|부사]] - 고조부 한홍빈(韓弘玭) 1805년([[순조]] 5) 생원시/지릉(智陵)[[참봉]] - 증조부 한용근(韓用近) 1848년([[헌종(조선)|헌종]] 14) 진사시 - 조부 한봉현(韓鳳鉉) [[산계|통덕랑]]; 생조부 한귀현(韓龜鉉) 1852년([[철종(조선)|철종]] 3) 진사시 - 부친 한직연(韓稷淵) 1894년([[고종(대한제국)|고종]] 31) 진사시/[[삼수군]]수] 아버지 한직연은 1909년 2월 삼수군수에서 해임된 이후 1914년 [[남포특별시|진남포부]]에서 의사로 개업하였고[* 1914년 6월 14일 면허 등록. 등록번호 490번. 당시 거주지는 진남포부 원당면 비석동.[[http://db.history.go.kr/id/gb_1914_06_06_a05530_0360|#]]], 1915년과 1916년 두 차례 다른 사람의 철광산을 양도 받는 등[[http://db.history.go.kr/id/gb_1915_10_23_a09670_0230|#]][[http://db.history.go.kr/id/gb_1916_01_15_a10320_0220|#]] 광산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한설야의 집안은 명문 양반가로서 가세가 매우 풍족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서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후일 [[정적]]이 되는 [[박헌영]]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동기사이. 그러나 새어머니와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하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떠나 전학, 졸업은 함흥에 위치한 함흥고등보통학교에서 하였다. 함흥고보 졸업 무렵 전국을 뒤덮은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결과로 3개월 정도 옥고를 치루었다. 함흥고보 졸업 후 함흥법전으로 진학하였지만 반일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제적되었다.[* 정확히는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의 [[니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하며 [[사회주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에 귀국, 고향으로 돌아가 교사생활을 하였다. 1925년 1월 단편소설 「그 날 밤」(『조선문단』)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사실상 작품이 창작된 연도와 잡지가 발간된 연도는 1924년도이기에, 북한에서는 1924년에 「그 날 밤」을 쓰고 등단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신나게 까내리던~~[[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추천을 통해 등단하였다.[* 이광수는 『조선문단』 창간호부터 1925년 1월호까지 주재자였다.] 이 가운데 1926년 아버지를 잃고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 현 [[랴오닝성]] [[푸순시]]에서 생활하였다.[* 이는 이후 그의 작품에 형상화 된다.] 그리고 192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카프]]에 가맹하였다. 그리고 그의 글에 따르면 이 시기 [[이기영(소설가)|이기영]]과 [[조명희]]를 알게 되고 친해진다. > 말하자면 그 때 포석(조명희)와 민촌(이기영)과 나는 한 가지로 문학에 뜻을 둔 청년이었다. (중략) 사실 나는 그들의 문학론보다도 그들의 작품보다도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더 좋아하였던 것이다. - 「포석과 민촌과 나」(1936) 당시 한국의 문단을 주도한 흐름은 소위 ''''경향주의'라 불리는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이 경향주의 성향의 작가들이 한 데 모인 조직이 바로 카프였다. 이윽고 한설야는 카프의 주요한 멤버로 발돋움하였고, 1927년 카프의 새로운 강령에 초안이 되는 「프로 예술의 선언」([[동아일보]], 1926년)을 발표하였다. > '사회를 위한 예술.' 이것이 우리 프로(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의 기치에 새겨져 있는 선언 강령이다. - 「프로 예술의 선언」의 마지막 부분. 이 시기부터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본격적으로 발산하며 카프 논쟁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8년 창작을 위하여 자신의 눈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보고 경험하려는 목적으로[* 물론 당시 카프 내부 논쟁에서 비판을 받았던 것도 한몫한다.]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가 1년간 생활하였다. 이를 통하여 「과도기」, 「씨름」 등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 [[조선일보]] 함흥지국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활발한 사회주의 운동과 창작활동을 벌이다가 1934년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년간 투옥되었다.[* 카프 제2차 검거사건 때 함께 검거된다.] 1935년 석방 이후 자신의 첫 장편소설인 [[황혼]]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도 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문학계와 정치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45년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당시 [[인민위원회#s-1|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의 함경도 대표를 지냈다. 그리고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상(장관급)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나중에 [[박헌영]]이 [[숙청]] 당하면서 [[남로당]] 계열의 문인이었던 [[임화]], 김남천부터 [[이태준(소설가)|이태준]]에 이르기까지 싸그리 숙청 당한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 한설야는 북한 [[김일성]] 정권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당시 이들의 숙청을 주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 당시 사석에서 [[김일성]]을 비판하는 말을--허거덩-- 했었고, 이로 인하여 얄짤없이 팽당한다. 이후 [[자강도]]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가 1976년 사망했다.[* 이 사망연도도 어디까지나 학계의 추정이지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말 그대로 [[토사구팽]].[* 단편소설 「개선」(1948)을 시작으로 장편소설 『역사』(1953) 등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주었던 소설을 썼던 걸 생각하면...] 그래도 오늘날까지 북한에서 완전히 '친일반동분자'로 매장된 남로당계열 작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그냥 애초부터 나쁜놈으로 설명된다.] 1980년대를 넘어가면서는 어느 정도 복권되었고, 북한의 [[국립묘지]]격인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점은 그만큼 그의 문학이론과 작품이 북한의 문예이론 형성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사실상 그를 제외하면 북한에서 문학이론을 설명하기 힘들어지니... [* 그의 작품은 공산권 국가에 조선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사실상 1950년대 북한의 국민작가였다.] == 관련 문서 == * [[북한/인물]] [각주] [[분류:북한의 정치인]][[분류:아시아의 소설가]][[분류:함흥시 출신 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청주 한씨]][[분류:1976년 사망]][[분류:니혼대학 출신]][[분류:애국렬사릉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