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회원수정)] [include(틀:다른 뜻)] * 대한민국의 대학교: [[대학 관련 정보]] * 교명에 '''한국'''이 들어간 다른 대학: [[한국대학교]] *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립대학, 공립대학 공동 학위제도의 임시 명칭: [[국공립대 공동학위제]] || [[파일:1950_graduation.jpg|width=100%]] || [[파일:4016501-gif.jpg|width=90%]] || || 1950년도 한국대학 졸업식 모습 || 1953년 발행된 한국대학 수료증 || {{{+1 '''韓國大學'''}}} Hankook College (1947~1955) [목차] == 개요 == 한국대학은 [[1947년]] [[10월]] 22일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이자 백범 [[김구]]의 수제자인 대용 한관섭(韓觀燮)이 조국해방과 더불어 김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민족정신을 계승할 목적으로 세운 한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야간대학]]이다. 당시 '''한대(韓大)'''라는 약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55년]] [[2월]] 14일 [[대한민국 교육부|문교부]]에 의해 폐교 조치되었으나, '국제대학'으로 재건되어 오늘날 [[서경대학교]]에 이른다. == 니혼대학 분교 제안 ==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7∼8년 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재학 중이던 한관섭은 니혼대학 총장을 단독으로 만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제강점기|한국]]에 니혼대학의 분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조국이 [[독립|해방]]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우리나라에 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당시 국내 사정으로는 그 여건이 전무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서라도 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일제강점기|한국]]의 실정을 잘 알지 못했던 니혼대학 총장은 이를 신통치 않게 생각했으나 젊은 청년의 뜻깊은 교육열의에 감동하여 여행의 형식으로 비밀리에 [[일제강점기|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니혼대학 총장이 건강악화로 인해 사망하여 니혼대학 분교 설립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 한국대학의 설립 == [[8.15 광복]]이 되자 한관섭은 [[돈의문|서대문]]에 있는 일본인 양옥을 접수하여 영어특수학원을 설립하고 자신의 전 재산과 총친들의 재산을 털어 [[강화도]] 교동땅, [[일산]]땅, 광나루땅을 매입해서 재단법인 한국학원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야간에는 비어 있는 [[선린인터넷고등학교|선린상업고등학교]] 교실을 빌려 꿈에 그리던 '''한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야간대학 '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한국대학은 대동상업고등학교로 교사를 옮겼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전국에 있는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제주도]] [[서귀포시|서귀포]] 정방폭포 정방사 입구에 초가집 1동을 한국대학의 분교로 하여 운영하였다. 전쟁 도중에는 부산 [[전시연합대학]]으로 합쳐져 운영되기도 했다. 수복 후에 한관섭은 대학 건물을 물색하던 중 장충동([[을지로]] 6가)에 텅 빈 아파트(일본 [[적산가옥]])가 있어 중구청을 통해 사용승인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 비로소 한국대학이 터를 잡게 되었다. == 학풍 == 당시 한국대학에는 2개 학부, 6개 학과가 존재했다. 학생수는 1천 3백명 가량이었다고 전해진다. 각 학부와 학과는 아래와 같다. * 법정학부 * 법률학과 * 정경학과 * 문리학부 * 영문학과 * [[경제학과]][* 1949년 폐지] * 수물학과 * 화학과 한관섭은 국가가 떳떳한 독립국가로써의 여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쉰다는 것을 죄악시했다. 따라서 낮에는 폐허화된 민족경제의 재건에 힘쓰고 남은 시간에는 민족 정신을 교육해야 한다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강조하였다. 또 [[학교]]는 오로지 면학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곧은 지론을 바탕으로 외부의 간섭도 용납치 않아 [[대한민국 교육부|문교부]]의 불필요한 지시도 거부했다. 당대 학계 최고 석학들을 교수진으로 초빙하고 토, 일요일에도 밤 늦게까지 직접 특강으로 보충강의를 하는 등 교육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당시 한국에는 정식 대학교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이 우수한 교수진들은 대부분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관섭은 교수들에게 직접 찾아가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공부하겠다는 학생들을 보고만 있어야 되겠느냐"며 여러 번 간청하여 우수한 교수들이 한국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유능한 교수를 계속 확보하기 위해 요즘의 [[스쿨버스|통학버스]]와 비슷한 개념인 12인승 [[마차]]를 만들어 교수들의 출퇴근을 돕기도 했다. 또한 [[신부(종교)|신부]], [[수녀]], [[목사]], [[스님]] 등 다방면의 종교계 인사를 초빙하여 종교특강을 실시하는 등 자율적인 학교 분위기를 만들어 의식수준 향상에 노력하였다. == 폐교, 재단 이양 == [[대한민국 교육부|문교부]]는 한국대학이 야간대학으로 인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허락없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608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6-08&officeId=00020&pageNo=2&printNo=9601&publishType=00020|주간대학 학생을 모집]]하였고 [[이사장]]과 [[총장|학장]]을 분리하여 운영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폐교]]를 명령했다. 1950년대 문교부는 무분별한 대학 설립을 막고자 대학설치 기준령을 제정하기로 하는데, 이에 대한 본보기로 한국대학을 선택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는 시각도 일부 있다. 당시 문교부가 지적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학칙변경 없이 주간과정 [[약학대학|약학과]] 학생을 불법 모집하여 대학정원 초과 * 교육제도에 없는 통신교육 실시, 통신교육생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한다고 허위광고 * 전임교수, 부교수, 전임강사 미채용 이에 대해 한국대학 측은 주간과정 학생 모집은 사전에 문교부의 언약을 받아서 한 것이고, 허위광고는 문교부 소관이 아닌 공보실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이며, 문교부가 교육법을 지나치게 적용하여 대학에 대해 무리한 처사를 하고 있다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30400209203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3-04&officeId=00020&pageNo=3&printNo=9863&publishType=00020|해명]]하였다. 결국 한국대학은 [[1955년]] 2월 14일 폐교의 운명을 맞이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폐교된 대학'''으로서 한국대학은 뜻하지 않게 이러한 불명예를 갖게 된다. 한관섭과 재단이사진은 이러한 행정처분에 대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11200209203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1-12&officeId=00020&pageNo=3&printNo=10145&publishType=00020|반발]]하여 문교부에 항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40300329203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4-03&officeId=00032&pageNo=3&printNo=2839&publishType=00020|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벌였지만, 끝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52600209203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5-26&officeId=00020&pageNo=3&printNo=9915&publishType=00020|패소]]하였다. 한국대학의 폐교는 당시 언론에서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22100209202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2-21&officeId=00020&pageNo=2&printNo=9853&publishType=00020|의문을 제기]]하며 과도한 처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한국대학이 위치해 있던 장충동 부지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에서 인수하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11600209202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1-16&officeId=00020&pageNo=2&printNo=9458&publishType=00020|전시군인연합대학의 교사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국내 유일의 4년제 [[야간대학]]인 한국대학의 특성상 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1,000여명의 학생을 편입시킬 학교가 마땅치 않았고, 이에 문교부는 기존 이사진을 해임시키고 한국대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낙하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21600209203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2-16&officeId=00020&pageNo=3&printNo=9848&publishType=00020|김정실을 한국대학 학장으로 위촉하여, 뒷수습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렇게 하여 [[김정실]]은 국제학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재학생들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3230032920302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3-23&officeId=00032&pageNo=3&printNo=2828&publishType=00020|한국대학의 복구, 김정실 학장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폐교 처분을 받은 지 한 달 만인 [[1955년]] 3월 28일 재단법인 국제학원에서 한국대학을 인수·승계, 국제대학으로 개명하여 [[성동구]] 신당동 224번지에 자리잡고 한국대학의 정신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서경대학교]]다. == 관련 문서 == * [[서경대학교]] [[분류:서경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