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EDC89><white> [[파일:8268D75B-42AB-4EBA-B9C5-0F0EA4AF4482.jpg|width=100%]] || ||<#FEDC89> '''{{{#670000 본관}}}''' ||<(><#ffffff>[[하(성씨)|진주 하씨]](晉州 河氏) || ||<#FEDC89> '''{{{#670000 이름}}}''' ||<(><#ffffff> 공진(拱辰) || ||<#FEDC89> '''{{{#670000 출신지}}}''' ||<(><#ffffff>[[고려]] [[경상도]] [[진주시|진주목]](晋州牧) || ||<#FEDC89> '''{{{#670000 생몰연도}}}''' ||<(><#ffffff> ? ~ [[1011년]] || [목차] == 개요 == [[고려]] 전기의 무신이자 목숨을 바쳐 [[성군]] [[현종(고려)|현종]]과 멸망의 위기에 빠진 [[고려|조국]]을 구한 [[충신]]으로 진주 하씨 시랑공파(侍郞公派)의 시조이다. == 생애 == 994년(성종 13)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목종(고려)|목종]]이 거처하는 궁궐 주변을 숙위했으며, 얼마 뒤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이 되었다. 1010년(현종 1)에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당하였다. 그 해 [[요나라]]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고려에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요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성종(요)|요성종]]을 만나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성종(요)|요성종]]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고려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으로 옮겨져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평소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탄로가 나 요성종의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성종(요)|요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요성종을 크게 격분시킴으로써 살해된 뒤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 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사형대에 올라가 거란 병사들의 수많은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사망한다. 유언은 '''"고려의 하늘이.. 고려의 땅이.. 보고 싶구나.."'''] 현종은 후에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하였다. ||<#FFF><tablewidth=600><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FEDC89>{{{#!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하공진유적비.jpg|width=100%]]}}} || ||<:><#FEDC89>{{{#670000 '''진주성에 있는 하공진추모비'''}}} || [각주] [[분류:생년 미상]][[분류:1011년 사망]][[분류:고려의 군인]][[분류:진주 하씨]][[분류:진주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