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bordercolor=#878787><tablealign=right> [[파일:external/1.bp.blogspot.com/2005040117.jpg|width=300]] || || '''성명''' ||피천득(皮千得) || || '''출생''' ||[[1910년]] [[4월 21일]], [[파일:대한제국 국기.svg|width=28]]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 || || '''[[선종(가톨릭)|선종]]''' ||[[2007년]] [[5월 25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향년 97세) || || '''본관''' ||[[피(성씨)|홍천]](洪川) || || '''신체''' ||155cm, 50kg || || '''학력''' ||후장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 || '''직업''' ||[[시인(문학)|시인]], [[소설가]], 영문학자 || || '''종교''' ||[[천주교]] ([[세례명]]: [[프란치스코]]) || || '''아호''' ||금아(琴兒) || || '''가족''' ||[[부인]] 임진호[* 1919년생으로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435|2011년에 선종했으며, 남편과 아내 모두 각각 97세, 92세로 굉장히 장수했다.]]],[br][[아들]] 피세영, 피수영[br][[딸]] 피서영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작가, 수필가. 대표작으로는 [[인연(수필)|인연]], [[은전 한 닢]] 등이 있다. [[https://www.ebs.co.kr/tv/show?prodId=352&lectId=1177947|EBS에서 제작한 관련 영상]]. == 생애 == [[1910년]], [[한성부]] [[종로]](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홍천군|홍천]]이며, 호는 금아(琴兒)이다. 부친은 구한말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지낸 관료 출신으로[[http://sjw.history.go.kr/id/SJW-K40020260-00200|#]] 서울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유명한 부호였다. 6살 무렵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피천득이 10살이던 1920년에는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서울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도중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1929년]]부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호강대학)[* 중국 공산화 후 폐교되어 없어졌다. 동문으로 [[김웅권]], [[주요섭]], [[주요한]], [[현진건]](중퇴) 등이 있다.]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37년]] 졸업 때까지 국내를 여러 번 오가며 많은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社[* [[록펠러]] 가문의 회사로 유명하다.]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서울]]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영문학 연구와 시 창작에 매진하던 중 [[1945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이름이 바뀐 [[서울대학교]]에서 [[1974년]]까지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약 1년간 영문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시]]의 [[성심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에는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 후 서울 반포에 있는 집에서 살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선종(가톨릭)|선종]]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를 멀리했기 때문에 97세까지 장수한 듯하다.[* 체질상 안 맞았다고 한다.] 말년에 수필 창작 활동이 없었던 것은 이전의 작품들을 뛰어넘는 글을 쓸 여력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다. 장례는 천주교 신자인 고인의 뜻에 맞게 장례미사로 치뤘다. 우연히도 이 장례미사를 행한 5월 29일(양력 기준)은 피천득의 생일이었다. 장지는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이다. == 작품에 대한 평가 == 그의 문학적 시작은 영문학, 시(詩)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교과서에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많이 실린 영향인지, 요즘 세대에게는 수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 실린 또는 실렸던 그의 수필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나의 사랑하는 생활 * [[인연(수필)]] * 수필 * [[은전 한 닢]] * 플루트 플레이어 == 일화와 지인들 ==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었음에도 다른 문학가들에 비하면 다소 조용히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의 수필 [[인연(수필)|인연]]에서는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고난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으며 그의 지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있다. === 일화 === [[인연(수필)|인연]]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딸 피서영에게 선물로 줄 인형을 사러 여러 백화점을 전전하다가 수필 [[인연(수필)|인연]]의 소재가 되는 일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아주는 [[딸내미바보]]이다. 그래서 그가 아들 둘이 더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당사자가 자신을 피천득의 아들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피천득 선생님에게 아들도 있었어요?'라고 물어보았다고 했을 정도다. 딸사랑이 지극하기로 유명했으며,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딸 서영을 두고 당시 [[이화여자고등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가 각축전을 벌이자 "수업일수 중 3분의 1을 결석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이화여고로 진학시켰다. 비가 오거나 조금이라도 아픈 날이면 무조건 결석. 대신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1:1 가르침을 받았다. 서영은 잦은 결석으로 인해 내신성적은 비교적 좋지 않았지만, 모의고사에서는 눈에 띄는 두각을 보였다고. 결국 서울대로 진학했으며 지금도 물리학자로서 훌륭히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교육 방식이 남달랐던 듯. 딸에게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을 멘토로 삼을 것을 권한 것도 피천득 선생. === 지인 === * 로버트 프로스트 * [[이광수(소설가)|이광수]] * [[안창호]] * [[윤오영]] * [[주요섭]] == 가족 == 그의 수필집을 보면 가족에 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가족들 또한 선친만큼 각자의 영역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다음 항목은 그의 가족 중 유명인사에 대한 것. * 피서영(皮瑞英): 그의 수필집에서 자주 언급되는 막내딸로 수필 <서영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 1965년 서울대 화학과에 합격(동아일보 1965년 2월 14일 호외 1면 서울대합격자 명단), 1970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서울대 총동창회 인명록)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65년 화학과에 합격하였으나 전과를 통해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한 후,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 시스템|뉴욕 주립대]] [[스토니브룩 대학교|스토니브룩 캠퍼스]]로 유학을 가 현재는 [[보스턴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http://physics.bu.edu/people/show/soyoung|#]] 유학 시절에 [[이휘소]]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또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 [[스테판 재키브]](Stefan Pi Jackiw): 피천득 선생의 외손자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아버지 로먼 재키브(Roman Jackiw)와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인 피서영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인기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더 나아가 앙상블 디토(Ensemble DITTO)에 소속되어 있다. 12세 때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데뷔했으며, 이후 에이버리 피셔 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며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학사 출신. * 피세영(皮世英): 그의 장남.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후, 60~70년대에 연극배우, 탤런트, 성우, 라디오 DJ 로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은퇴 후 30여 년간 [[캐나다]]에서 [[치과]] 기공소를 운영하다, 2011년 7월경에 귀국하여 [[경북]] [[문경시]]에 수목원을 짓고 있다고. 귀국은 부친의 생전 뜻이기도 했다고 한다. * 피수영(皮守英): 그의 차남. 서울대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미네소타 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과장 및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퇴임 후 현재는 하나로의료재단 경영고문으로 있다. 「피가지변」이라는 수필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 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올 것이다'가 피수영 씨를 가리킨 부분.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910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홍천 피씨]][[분류:모란공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