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rd1=피에타(영화))] [목차] == 설명 == [[이탈리아어]]: Pietà ||<table align=center><:><width=37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etro_Perugino_cat19.jpg|width=370]] ||<width=48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nguerrand_Quarton%2C_La_Piet%C3%A0_de_Villeneuve-l%C3%A8s-Avignon_%28c._1455%29.jpg|width=480]] || ||<:> 피에타, 피에트로 페루지노, 1483~1493년, 우피치 미술관 ||<:> 아비뇽의 피에타, 앙게랑 카르통, 15세기 중반, [[루브르]] 미술관 ||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 '[[야훼|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예술의 주제 중 하나로, 14세기경 [[독일]]에서 처음 다루기 시작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슬피 우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주제를 나타낸 그림도 많이 있고 조각도 그것에 못지 않게 많이 있지만...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 ||<width=700px><table align=center><:> [[파일:external/2.bp.blogspot.com/la-piedad-basilica-de-san-pedro-ciudad-del-vaticano-roma-italia1.jpg|width=400]]|| ||<:> 피에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98~1499년, 대리석, 174cm × 195cm,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 뭐니뭐니해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위 사진)이 가장 유명하다. 아무런 설명 없이 달랑 '피에타' 단어 하나만 사용했다면 십중팔구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의미한다. 당장 [[구글]] 검색에 'pieta'를 치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제일 먼저 뜬다. 1499년 당시 '''24세'''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그의 무덤을 장식할 조각상을 제작한 것이 바로 피에타다. 정작 미켈란젤로는 주문자가 계약 완료 시점보다 이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보수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미켈란젤로가 직접 서명을 새긴 작품이다. === 구성 === 조각상의 구도를 보면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삼각형]] 형태인데, 성모 마리아를 [[예수]]보다 훨씬 크게 조각해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했다.~~실제로 이 비율이었다면 마리아는 아들이 죽은 슬픔을 로마군을 때려잡으며 달랠수도 있는 거인이 된다~~ 이는 이전까지의 피에타는 물론이거니와 동시대에 그려진 페루지노의 피에타와 비교했을 때 어색하지 않은 구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반영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지만,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취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미켈란젤로의 재능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이를 두고 '피에타는 인간이 아닌 [[야훼|하느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작품이기 때문에, 90도 각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신체비율이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만들어졌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ostrama&logNo=110099842738&categoryNo=36&viewDate=¤tPage=1&listtype=0|자세한 설명과 함께 피에타 상을 위에서 본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교한 예수의 근육묘사와 마리아의 옷주름을 보면 가히 조각으로 이렇게까지 묘사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예수]]보다 젊게--[[동안]]-- 묘사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아들보다 젊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조각 완성 당시부터 있었다.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기를 쓴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 1525~1574.12.10)에게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특히나 이 피에타가 유명한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들 중에서 그의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으로,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에 "MICHAEL·ANGELVS·BONAROTVS·FLORENT·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의하면 피에타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롬바르디아 출신의 2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하자 미켈란젤로는 그 말에 화가 나 밤중에 몰래 성당으로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하지만 그날 성당을 나서는 길에 본 아름다운 밤풍경에 '''"하느님께서도 이런 아름다운 작품에 당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는데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라고 깨달아 뒷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서 이후에 자신이 만든 작품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반달리즘의 피해 ===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녀 베드로닐라 제대에 있었던 피에타는 교황 [[율리오 2세]]가 옛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여러 차례 이동했다가 1749년에 현재의 위치에 놓여졌다. 1736년에는 피에타의 아름다움에 혹한 한 남성에 의해 [[성모 마리아]]의 왼쪽 손가락이 부서져 주세페 리리오니(Giuseppe Lirioni)가 깨진 부분을 갈아서 접합시켰다. ||<width=400px><tablealign=center><:> [[파일:external/55409f23e50b458afd5dc11940e90db9f388901c38515c366db9f25acab72937.jpg|width=400]] || ||<:> 1972년 5월 21일, 라슬로 토트가 자행한 반달리즘 || 피에타가 겪은 최악의 피해는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출신의 라슬로 토트가 저지른 [[반달리즘]]으로 인해 박살났던 것이다. 당시 그 반달리스트가 외친 구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I am Jesus Christ)"'''였다고. 주변에 있던 관광객에게 흠씬 두들겨맞다가 경찰에 체포된 그는 끌려나가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 [[파티마의 성모|파티마의 계시]]를 밝혀야 한다"고 계속 외쳐댔다.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565|기사]] 일부 파편은 당시에 있던 사람들이 가져가 버렸다. 대부분은 찾았지만 못 찾은 부분 역시 있었는데, [[성모 마리아]]의 [[코]]는 다시 찾지 못해서 [[등(신체)|등]]에서 일부를 떼어와 복원했다. 복원된 상은 [[방탄]][[유리(물질)|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유리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 덧붙였다는 걸 알 수 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11700209204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1-17&officeId=00020&pageNo=4&printNo=15781&publishType=00020|복원작업에 대한 1973년 1월 17일 동아일보 기사]] 복원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리석 가루와 조각을 붙일 접착제로는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사용했고, 절단된 팔 부분은 산화 방지 철근을 끼워 넣어 몸체와 접합시켰다. 또한 1749년 피에타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깨져서 절단면을 갈아 붙였다가 1972년에 다시 깨진 손가락 부분은 최초 조각 당시의 길이와 관절의 모양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대리석보다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복원 사실이 드러나게 처리했다. 토트가 휘두른 망치에 입혀진 녹 방지 물질이 성모 마리아의 눈썹에 묻어 생긴 얼룩은 화학 용제로 녹여내거나 칼로 긁어낼 경우 대리석에 더 큰 타격이 가해질 수 있었지만, 의외로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바로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내''' 얼룩을 제거한 것. === 기타 === 세계 각지에 피에타의 복제품이 모셔져 있는데([[http://en.wikipedia.org/wiki/Replicas_of_Michelangelo%27s_Piet%C3%A0|링크]]), [[바티칸]]의 감수를 받은 정교한 복제품 중 하나가 [[천주교 수원교구]] [[분당요한성당]]에 2001년부터 보관되어 있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209/h2012091021080121950.htm|기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경기도]] [[안성시]]의 [[미리내 성지]]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의 피에타 상이 2017년에 세워져 있다. 정식 이름은 '순교자의 모후'상. 2018년 [[문재인]] 티모테오 대통령의 [[바티칸]] 방문 당시에 유리를 걷은 채 피에타를 관람하도록 [[교황청]]에서 배려하였다.[* 씨브라더 영상에 보면 관람장면 뒤에 유리가 보이는데 해당 유리가 그 방탄유리로 보인다.] 만화 [[상남2인조]]에 나오는 [[카데나 나오]]의 등에 이것을 새긴 [[문신]]이 있다. 만화 [[세인트☆영멘]]에서는 베드로 본인이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려고 하다 반팔 티셔츠, 반바지, 샌들 차림이라는 지나치게 가벼운 복장이라서 경비원에게 제지당하는데, 이 때 피에타를 가리키면서 “저기 [[예수|장발 수염]]은 팬티 한장 입고 있는데 나는 왜 못들어가냐”고 따졌다. [[아스가르드(게임)|아스가르드]] [[밀레스]] 데일리 퀘스트 퀴즈 문제 중 하나로 출제된다. 액션 게임 [[Blasphemous]]에서 피에타에서 모티브를 따온 [[Blasphemous/적#s-3.2|텐 피에다드]]라는 보스가 출현한다. 이름 Ten Piedad는 스페인어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피에타와 같은 뜻이다. 2008년에 폴란드 출신의 아티스트가 [[마리오 시리즈]] 버전으로 [[http://it.chosun.com/m/svc/article.html?contid=2010031985030|패러디 하기도 했다.]] 재질은 [[스티로폼]]이라고 한다. ==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 ||<table align=center><width=650px><:>[[파일:external/f.hikr.org/1023451l.jpg|width=650]] || ||<:>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Mutter mit totem Sohn), 케테 콜비츠, 청동, [[독일]] [[베를린]] 노이헤 바헤[* 구 프로이센 왕세자궁(현 베를린 국립미술관 별관)의 경비초소] || 미켈란젤로 피에타가 완성된지 500년 후,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인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7.8~1945.4.22)가 피에타를 [[모티브]]로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38.0 × 28.5 × 39.0cm, 1937~1938년)를 만들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 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는 주로 [[노동자]] 계층의 고된 노동, 질병, 가난을 주제로 삼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들이 전사한 이후에는 [[반전]]과 [[평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다. 콜비츠는 "예술에서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은 삶에 대한 위선이다"라 할 정도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때문에 위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다르게 나이 든 어머니에 품에 안긴 아들의 모습을 표현해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의 모습 또한 표현하고 있다.콜비츠 개인적으로도 아들과 손자를 전쟁으로 잃은 아픔이 있어 그 고통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독일이 통일된 후인 [[1993년]], 독일 정부는 노이헤 바헤(전쟁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를 재개관하면서 콜비츠의 이 작품을 1.6배 크기로 확대해 노이헤 바헤에 전시했다.[* [[동독]] 시절에는 저 자리에 공산진영 특유의 추도 시설의 현태를 좇은 '영원의 불'이 있었다. 독일 통일 후 철거하고 설치한 것.] 조각 앞에는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Den opfern von krieg und gewaltherrschaft)'이라는 [[독일어]] 명문이 새겨졌다. 천장에 뚫린 천창을 통해 떨어지는 눈비를 맞고 있는 어머니는 품에 안은, 잔뜩 웅크린 자식을 놓지 않으며 이를 통해 자식을 잃은 슬픔에 잠긴 미약한 인간의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분류:미술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