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tablewidth=50%><tablealign=right><#C0C0FF><:> {{{+1 '''평양성 전투 (371년)[br]平壤城戰鬪'''}}} || ||<:><#C0C0FF> '''시기''' ||<-2>[[371년]] 10월(음력) || ||<:><#C0C0FF> '''장소''' ||<-2>[include(틀:지도, 장소=평양직할시 평천구역, 높이=200, 너비=100%)][br][include(틀:지도, 장소=평양직할시 중구역, 높이=200, 너비=100%)][[고구려]], [[평양성]][br](현재 [[평양직할시]] [[평천구역]] 및 [[중구역]] 일대) || ||<:><#C0C0FF> '''원인''' ||<-2>[[고구려]]의 [[치양 전투|예방전쟁]] 실패 후, [[백제]]의 반격. || ||<width=10%><#C0C0FF> '''교전국''' ||<width=20%>{{{+1 [[백제]]}}} [[파일:external/s24.postimg.org/K_001.jpg|width=50]] ||<width=20%>{{{+1 [[고구려]]}}} [[파일:고구려 군기.png|width=50]] || ||<:><#C0C0FF> '''지휘관''' ||'''[[근초고왕]] (부여구)'''[br]태자 [[근구수왕|부여수]] ||<^|1>'''[[고국원왕]]'''[[전사|†]] [br]태자 [[소수림왕|구부]] || ||<#C0C0FF><:> '''병력''' ||30,000 명 ||병력 규모 불명 || ||<#C0C0FF><:> '''피해''' ||피해 규모 불명 ||[[고국원왕|최고 지휘관]] 전사[br]그외 피해 규모 불명 || ||<:><#C0C0FF> '''결과''' ||<-2>'''백제의 승리.''' || ||<:><#C0C0FF> '''영향''' ||<-2>백제, 한반도 주도권 장악.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발발한 전투. [[백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전투이자, [[고구려]] 역사상 왕이 전사한 유일한 전투이기도 하다. == 배경 == * 관련 내용은 [[치양 전투]]도 참고. ||<tablealign=right>[[파일: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 지역.png|width=100%]]|| || ▲[[치양 전투|치양]]과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의 위치 || [[치양 전투]]에서 [[근초고왕]]과 태자인 [[근구수왕|부여수]]의 활약에 패배한 고국원왕은 또 다시 군대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한다. >26년(서기 371년),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8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24권 백제 본기 제2 근초고왕]]}}} 하지만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전략을 예상하고 오히려 매복을 통해 패하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는데, [[근초고왕]]은 2차례의 공격을 물리친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진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왕|부여수]]와 함께 백제 정예병력 3만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한다. == 전투 양상 == >371년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8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24권 백제 본기 제2 근초고왕]]}}} ---- >41년(서기 37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51&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 고국원왕]]}}} 근초고왕의 정예병 3만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고국원왕]]은 태자인 구부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 방어에 나선다. 당시 평양성은 수곡성과 함께 대(對) 백제 전선을 상대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고국원왕]]이 갑오(甲午)년에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백제의 공격을 대비해 성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이다 보니, 전투는 무척이나 치열하게 펼쳐진듯 보이는데 근초고왕 본기에는 "고려 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高麗王斯由 力戰拒之)"했다는 대목이 보여진다. 고구려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황색 깃발의 백제군의 공격은 매서웠는데 때 마침 고구려의 국왕이자 고구려군의 총 지휘관인 [[고국원왕]]이 적군의 눈 먼 화살[* 누가 쏘았는지 알 수 없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백제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현재까지는 [[고구려]]군의 방어도 거셌지만, 백제군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퇴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 전투 이후 == === 고구려 === 이때 화살을 맞은 [[고국원왕]]은 10월 23일에 화살의 상처로 인해 사망하게 되고 이후 고구려는 [[태자]]였던 구부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소수림왕]]이다. 고국원왕은 고국(故國)이라는 지역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때의 패배로 인해서인지 이후 [[금석문]] 등에 백제를 일컬어 백잔(百殘, 백제 떨거지 놈들)[*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비하해 '백제 떨거지 놈들'이라는 의미로 부른 멸칭이다.]이라는 비하적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공문서에 "북괴" 같은 비하 단어를 쓴 셈(...)[* 반대로 《[[일본서기]]》에 실린 《[[백제기]](百濟記)》등의 백제 사서에서는 고구려를 "짐승 박(狛)"자를 고구려 지칭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백제]]에서는 고구려를 짐승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광개토대왕릉비]]』}}} === 백제 === [[백제]]는 [[대동강]] 근처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근초고왕]]은 평양성 전투 이후,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남평양을 빼앗았다고 언급되는데 이 남평양이 평양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서기 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수도를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楊州)】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608&cid=49616&categoryId=49616|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현재는 전하지 않는 《고전기(古典記)》라는 책을 인용한 기록이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평양성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기록과, [[소수림왕]] 본기에 백제가 평양성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오류라는 쪽이 좀 더 가깝다. 한편 이 전투는 백제로서는 꽤 자부심이 있던 전투였는지 훗날 [[개로왕]]이 [[북위]]에 지원을 바라는 표문에도 "그 때 우리가 고구려 왕 목을 벨 정도로 발라버러서 고구려 놈들은 남쪽만 보면 지려버린당께요." 고 쓰기도 했다. >[[고국원왕|쇠(釗)]]가 경솔하게 (우리와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치양 전투|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근구수왕|수(須)]]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후략)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91&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25권 백제 본기 제3 개로왕]]}}} 그리고《[[삼국사기]]》의 편찬자는 이를 두고 "전공을 과장했다." 고 평가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나라에 보낸 표문에 ‘쇠(釗)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51&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 고국원왕]]}}} ==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 [[근초고왕(드라마)|KBS의 사극인 근초고왕]] 55화에 등장. 하지만 철수가 지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언급되는데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언급되는 기록을 보면 평양성 전투는 371년 겨울인데 반해, 지진이 일어난 건 372년 가을이다. 제작진이 착각을 했거나 드라마 진행을 위해 각색을 한 듯 보인다. * [[천년의 신화]]에서도 백제 마지막 미션으로 등장. 여기서는 실제 역사와는 달리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전체 미션을 통틀어서 한 국가의 영웅이 유일하게 모두 나오는 미션이기도 하다. == 관련 문서 == * [[평양성 전투]] [각주] [[분류:전투]][[분류:공성전]][[분류:한국사/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