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bg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1~2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width=30%> 92호 ||<|2> ← ||<width=30%> '''93호''' ||<|2> → ||<width=30%> 94호 || || 여주 하리 삼층석탑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 || [[파일:파주_용미리_마애이불입상.jpg|width=400]] [목차] == 개요 ==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고려]] [[선종(고려)|선종]] 시기, 혹은 [[조선]] [[세조(조선)|세조]] 시기에 만들어진 한국의 대형 거불입상.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대한민국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암벽에 새긴 거대한 마애불이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7.4 m, 얼굴 크기는 2.4 m 정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1932)[* 일제시대 승려 안진호(安震湖, 1880-1965)가 기록한 책이다. 안진호는 1925년에 조선불교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의 사찰이며 중요시설들을 견학하였는데, 특히 사찰들마다 자기네 역사를 기록한 사지(寺誌)를 보여주는 데 충격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온 뒤 자신도 조선 사찰들의 사지를 집필하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외에도 안진호는 당시 조선 불교계의 의례를 집대성하고 표준화한 ≪석문의범(釋門儀範)≫을 출판하여, 조선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의례도 석문의범에 수족된 절차를 조금 단순화한 것이다.]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불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전설화가 전해온다. >고려 제13대 왕 [[선종(고려)|선종]]은 평소 자식이 없어 걱정이 많았다. 후궁이 이를 못내 안타까워하다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도승 2명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지금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다오."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후궁이 꿈에서 깬 뒤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니 왕이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 1963년에 우리나라의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었으며, [[관촉사#s-3|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거불석상으로 매우 유명한 문화재이다. == 조선 세조대 조성설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02100209129003&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0-21&officeId=00020&pageNo=29&printNo=23003&publishType=00010|1995년 10월 21일 동아일보 : 파주 용미리 石佛(석불)입상은 世祖(세조)11년 제작. 발원문 탁본서 밝혀져]] 오래전부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석불로 여겼으나, 최근 연구에서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불상이라는 설이 등장하여 건립연대를 두고 두 설이 팽팽히 맞붙은 상황이다. 조선 세조 시기 건립설의 가장 큰 근거자료는 1995년에 발견된 조성문(造成文)이다. 알고 보니 이 불상을 처음 세울 때 그 몸체에 새긴 조성명문 2백여 자가 있었으나 기존에는 판독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신 과학기술을 이용해 판독한 결과 용미리석불이 세조의 왕생정토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며, 성화(成化) 7년(1471) 7월에 세조와 그 부인 정희왕후의 미륵부처 용화회에 참석해 일시에 깨달을 것을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願彌勒龍華之中類在初會作上正法, 當來彌勒如來大聖 世祖大王往生淨土) 이 명문에는 이 용미리 불상을 만들 때 시주한 사람들의 내역 또한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세조에 협조한 함양군([[양녕대군]]의 둘째아들), [[한명회]]의 셋째부인 정경부인 이씨, 세조의 외삼촌 심장기, 당대 왕가와 가깝던 승려 [[혜심]] 등 왕실 인물 약 20여 명이다. 즉 이 용미리불상은 조선 세조와 그의 부인인 [[정희왕후]]를 미륵불의 형상으로 묘사한 부부상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 세조대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 용미리석불이 있는 파주는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고향이며, 세조 6년(1460)에 정희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된 곳이다. * 이 석불 바로 인근에 예종, 성종의 비로 요절한 한명회의 두 딸의 무덤(공릉과 순릉)이 있다. 즉 시주로 참여한 이들은 세조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동시에 예종·성종 비의 능이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대불을 조성했으며, 당시 권세와 재력을 겸비한 이들이 기존 석불을 중수하기보다는 새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 조성기 명문에 새겨진 이들은 당시로선 왕실의 최고위 인물들로, 명문에 열거된 이들의 면면을 볼 때 단순히 고려시대의 불상을 중수한 중수기에 이름을 넣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 불상이 머리에 쓴 원정모(圓頂帽) 형태의 보개. 원정모는 원나라 귀족들이 쓰던 모자인데 연대적으로 선종 재위기인 고려 초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여말선초 시기에만 관리와 승려들이 사용했다. * 고려시대 중기인 1144년에 [[김부식]]이 찬한 ‘혜음사신창기. 1144년에 김부식이 이 지역을 유람하며 이 불상이 있는 혜음사에 대하여 절뿐 아니라 숙박기관, 행궁의 기능까지도 겸한 특징까지 모조리 설명했는데, [[랜드마크]]로서 부족함이 없었을 용미리석불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에 용미리석불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이 불상이 정말로 세조 대에 만들어졌다면, 왜 고려 선종의 한산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붙었을까? 이에 대해서 이한성 동국대 교수는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7604|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역사서에 따르면 한산후 윤은 14대 헌종의 아우인데 헌종에게 양위를 받아 등극하는 15대 숙종(삼촌)에게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는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것. 즉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본따 불상을 만들었는데,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그 불상에 350년 시차를 두고 왕위찬탈을 위해 두 왕조에서 벌어진 삼촌에 의한 조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함께 대입시키면서 세조의 불상에 고려 한산후에 대한 민담들이 함께 붙었고, 더 긴 세월이 흐르면서 아예 그 민담들이 설화로 둔갑되고 불상 또한 세조와 정희왕후의 불상에서 고려 선종이 만든 불상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불상의 모습이 고려시대의 양식을 잇는다는 점, 그리고 최근까지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간주된 점 등을 근거로 여전히 고려 전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아직은 공식 정설상으로 여전히 고려시대의 불상이라 할 수 있다.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329|현대불교 : 용미리석불 조성연대는 고려 or 조선? 이경화 조선대 강사, 1471년 조성설 제기]]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8578|불교신문 : 파주용미리석불 조선세조때 조성]] [[http://star.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2564|오마이뉴스 : 저 입상, 정말 세조임금의 부부상일까? [여행] 경기 파주 용미리 쌍미륵석불입상의 전설과 가치, 용암사 풍경]]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760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 30] 의주대로 따라 용미리 마애불로]] == 바깥고리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7036&cid=40942&categoryId=33382|두산백과 :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 보물 제93호 ==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0930000,31&flag=Y|문화재청 홈페이지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분류:대한민국의 보물]] [[분류: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