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쇼와 시대]] '''{{{+3 특수위안시설협회(特殊慰安施設)}}}''' '''RAA'''('''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파일:DQmXL5Z86gJwq5tSXp6bPe8N8eRisrmpgkJLBAsJnUWMXbu.jpg]] [[미합중국 해군]] [[장교]]들과 특수위안시설협회 [[여성]]들.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np1d1sL2N91uw5obro1_500.jpg|width=400]] [목차]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 점령군 전용의 [[매춘부]]('''팡팡걸''')가 있는 위안소를 가리키는 말. 그 당시 '''특수위안시설협회'''에서 일하던 여성들은 사실상 '''[[주일미군]] 전용 일본인 위안부''' 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주일미군(용) 일본인 위안부'들을 '''양빵'''이라고도 불렀다. 당연하게도 일본인 상대의 일본인 매춘부는 이렇게 불리지 않았다. [[http://enjoyjap.egloos.com/1924854|#]] 영문 명칭과 한자 이름이 꽤 차이가 많은데, 이는 '''위안'''이라는 단어가 [[일본군]]에서 갖는 의미와 [[미군]]에서 갖는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군]]에서 군 위안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위문공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처음엔 [[미군]]도 그렇게 알았다가 그 [[매춘|실체]]를 알고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물론 처음에만 당황하고 얼마 안 가서 바로 애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동양]]에 대한 판타지가 어느 정도 있어, 성인용 [[포르노]] 시장에 일본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서부를 중심으로 많이 나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리고 그것이 드디어 현실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일본군]] 군사용어에서의 위안은 [[매춘]] 그 자체를 가리킨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정확하게는 전투정지 발령)로부터 3일 후인 [[1945년]] 8월 18일, 조만간 해산될 것임에도 아직 군정을 맡을 [[미군]]이 진주하지 않아 [[일본제국 내무성|일본 제국의 본토를 다스리는 내무성]]이 [[도도부현]]청의 경찰부장(警察部長)과 현지사(縣知事)에게 포고문(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을 전달하면서 점령군 대책의 일환으로서 위안시설의 설립을 준비할 것을 지시해 26일에 정식으로 발족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를 [[미군]]이 강요했다는 속설이 일부 나돌곤 하나, 실제로는 일본 제국의 내무성이 자주적으로 만든 것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일단 기본적인 발상은 전시 [[일본군 위안부]]와 같지만, 이 경우는 약간 다르다.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위안부]] 모집 처럼 중개업자를 통하지 않고, '''"일본 여성을 위한 방파제를 쌓자!"'''는 슬로건을 내세워서 아예 '''일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본 정부]]가 공개 모집을 한 것이다.''' 즉, 건장하고 난폭한 미군의 성욕으로 연약한 동양 여성인 일본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강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의 성욕을 비교적 건전한(?) 방향으로 돌려 연약한 일본 여성들을 보호하겠다는 것. 다만 흔히들 알려진 것처럼 대놓고 [[성노예]]화 하는 것은 아니었고, 엄격히 따지자면 [[접대부|호스티스]]로서 모집을 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는 [[미군]]이 대놓고 '윤락업소'를 만드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초에는 전문적인 [[매춘부|윤락여성]] 및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게이샤]]들을 대량 고용할 예정이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일본인]] 윤락녀가 위안부로 동원되어 충분한 숫자를 모을 수가 없었다. 이에 특수위안시설협회는 협회 명의로 <신(新) 일본 여성[* '''신여성''' 즉, 당시의 자유연애론자 여성을 가리킨다. 이런 조건이 붙은 데는 '신여성'을 '성적으로 방탕하다'고 여긴 당시 일본 군부 및 [[일본 정부]] 사람들의 편향된 의식이 작용했다.]을 구함. 숙소, 의복, 식료 모두 지급> 같은 내용의 공고문을 [[도쿄]] 및 [[미군]] 진주가 예상되는 주요 도시의 번화가에 설치하는 한편, 신문 광고를 내서 일반인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부터 [[위안부]] 문제에서 드러난 협잡질이 그대로 재현되었는데, '''채용 목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광고에 기재되지 않았고, 이를 보고 온 여성 상당수는 윤락업 및 접객업 종사 경험이 없었다.''' 그나마 대부분은 일의 내용을 듣고 취업을 포기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비해, 그나마 자국민이라고 '강제 납치'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그러나 당장 생활력이 없는 전쟁 [[과부]] 입장에서는 마땅히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었고, 또한 일본 [[사창]]문화 특성상 가족이 딸을 파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탓으로, 결국 1945년 9월 [[미군]] 진주를 전후해서 1,300명 남짓한 인원이 협회의 '접대부'로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들은 9월 [[미군]] 진주 이후 1946년 1월까지 약 4개월간 [[미군]] [[장병]]들을 상대로 영업, 즉 접대 및 [[매춘]]에 나섰다. 1946년 1월 21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인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했다. >'''우리 [[미군]] 장병들이 [[일본|다른 나라]]에 가서 [[매춘부|윤락녀]]들과 놀아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런 업소들은 [[미군]]이 주둔한 곳이라면 전세계 어디든지 있었지만, '''[[일본 정부|패전국 정부]] 차원에서 미리 시설을 만들어 [[미군]]을 대접한 것은 [[일본]]이 유일했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이 문제에 격분한 것은 본인이 여성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인물인 것과 더불어, 이렇게 '''[[일본 정부|정부]] 차원에서 윤락업소를 운영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탓이 컸다. 여기에 특수위안시설협회 소속의 접대부들 상당수가 일반인이어서 성 지식이 부족한데다 '''[[공창제|공창]] 또는 [[사창]] 처럼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닌, 2차 중심의 업소여서''' [[성병]]이 만연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로인해 결국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서 '특수위안시설협회'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더 터진다. '''[[일본 정부|정부]]에서 모집한 주제에,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때 해산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여성 대다수는 배운 게 이것 뿐이라고 결국 기존의 특수위안시설협회 위안소 근처 술집과 업소들에 다시 취업, 다시금 [[주일미군]] 장병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웃기는 얘기지만, 이때가 차라리 더 대우가 좋았다고 한다. 협회에 속해 있을 때에는 상대 [[미군]]에게 개인적으로 받는 [[팁]]도 협회에 모두 바쳐야만 했지만, 오히려 [[사창]]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게 다 개인 소득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특수위안시설협회 소속 접대부들이 현대 일본 [[접대부|호스티스]]의 원조이다. 또한, 이 일과 관련해서 [[미군]]은 결국 1947년 1월 15일,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어 포츠담명령[*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라 미군의 명령을 받아 [[일본 정부]]가 내리는 행정명령.] 중 칙령 제9호 <부녀에게 매음을 시킨 자 등의 처벌에 대한 칙령>이라는 명령을 자그마치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내리게 만들었다. 이는 성 구매자는 처벌하지 않으면서 성 판매자와 포주를 동시에 처벌하는 현대 [[일본]] [[사창]] 금지 및 [[인신매매]] 금지법의 배경이다. 어느 나라건 윤락업 종사 여성은 [[인신매매]]를 당한 것으로 간주할 여지가 많은데, 일본의 경우 이것이 1870년대부터 수 차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항상 유명무실화되었다. 심지어 법령으로 해외 진출까지 금지하는 판에도 버젓이 해외 진출, 일본의 주된 외화 수입원이 되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이 칙령 제9호 이후로 최소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는 그 전까지의 [[인신매매]] 금지령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이후 이 '''빵빵걸'''들은 1946년에는 전국에서 7만에서 8만명, [[한국 전쟁]]이 격화한 1952년에는 10만명 가까이가 있었다고 여겨지며, 1956년(쇼와 31년)의 '매춘 방지법' 시행 이후에는 격감했지만, [[베트남 전쟁]]이 격화한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도 미군 기지 주변에는 항상 존재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빵빵걸'들은 전후 일본의 외화벌이에 큰 도움이 되었었는데 일본의 1952년도 획득 외화중 무려 '''1.5억 달러'''가 이들 빵빵걸들의 [[주일미군]] 상대 [[매춘]]으로 인한 '외화벌이'였던 걸로 추정 될 만큼 이 '빵빵걸'들로 인한 외화벌이는 당시 [[일본/경제|일본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즉, 당초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소속 점령군 장병들의 성범죄를 막기 위한 일명 '''「육체의 방파제」'''란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의 외화벌이'로 그 설립 목적이 완전히 변질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http://enjoyjap.egloos.com/1924854|출처]] == 여담 == 전후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린 [[마쓰모토 세이초]]가 조선의 [[전라북도]] [[정읍시|정읍]]에서 패전을 맞이할 때, "일본 주둔군 당국이 [[미군]] 진주군을 위해, '''일본 거류민''' 중에서 '''부녀자'''들을 뽑아서 '[[특수위안시설협회|이런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물론 정읍에 무장 해제차 들어온 미군들은 '[[특수위안시설협회|이런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정신대 실록 <분노의 벽>을 집필한 허문순은 자신의 작품의 후속작으로 바로 이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다루려고 했었다. [[대망#s-4]]의 원작자 [[야마오카 소하치]]가 이런 '특수위안시설협회'를 긍정하는 글을 쓴 바 있다. 60~70년대 [[주한미군]]을 접대하는 한국의 [[양공주]]를 관리하면서, [[한국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일본의 이 '''특수위안시설협회'''를 긍정하는 발언을 한적도 있었다. 일본의 핑크무비 <육체의 문>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있다. 위에 나온 [[마츠모토 세이초]]의 소설인 '제로의 초점'(한국 정발명: 제로 포커스)에서도 '''RAA'''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작품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 [[미즈류 케이]]는 [[함대 컬렉션]] 설정을 차용해서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배경으로 한 [[동인지]]를 그린 전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