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동로마 제국]]의 상비 중앙군. 복수로 '''타그마타'''라고 쓴다. 단어적 의미로는 약 400~600명으로 이루어진 '''연대'''의 의미이며, 말기 로마군의 코미타텐세스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천년을 존속한 동로마 제국의 역사상 구성의 변천이 컸다. == 시초 == === 타그마의 시초 === 이미 로마제국 말기에서부터 일정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 구성을 반돈, 혹은 타그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타그마라는 단어는 7세기 말엽부터 상비 중앙군이라는 의미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전 황제들이 이슬람의 공세로 [[테마 제도]]를 공고히 하여 지역방어를 확충하자, 지역의 테마군을 이끄는 지방관인 '''스트라테고스''', 즉 도독들이 테마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획책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또한 7~8세기 동안 로마제국이 국력을 회복하면서 수세적 의미의 지방군이 아닌 재수복 전쟁에 투입될 중앙군의 필요성 또한 강화되었다. 결국 동로마 황제들은 스트라테고스들의 반란을 억제하고 재수복전쟁의 중심 전력이 될 중앙군을 건설해야 했고.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는 황실 친위대의 숫자와 질을 대폭 상향시키면서, 단지 황실 경호와 의전이 아닌 중앙 야전군으로 재편했다. === 타그마의 성장 === 특히 이러한 모습은 8세기 중엽 [[콘스탄티노스 5세]] 시기에 더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스콜라이 팔라티니 친위대와 [[에테리아]]는 군제 개편을 거쳐 강화, 확대되었고. 5세기에 창설 되어 궁정 경호병의 성격을 가졌던 엑스쿠비티는 급격한 중기병화와 지휘관의 격상을 거쳐 야전군으로 재편되었다. [* 이전 엑스쿠비티는 서유럽으로 치환하면 백작급의 단위인 '코메스'가 지휘했다면, 개편 후 엑스쿠비티는 동, 서방 야전사령관직인 '도메스티코스'가 지휘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성상숭배논쟁에서 [[성상파괴운동]]을 지지했고, 정통 교리를 지지하던 귀족들에 대항한 물리적 강제력이 필요했기에 중앙 타그마들을 강화하는 한편 성상파괴론자로 채웠다. 성상파괴론이 종식된 이후로도 타그마는 성장세를 거쳤다. 8~9세기경 제국이 성상파괴의 홍역을 마친 뒤, 제국군은 이 시기 확충된 타그마타들은 재정복전쟁의 중역으로 참전하였다. 기병화는 더더욱 강화되어, 주요 타그마들은 9세기경이 되면 2/3이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수세적인 테마군이 적을 유격전과 농성전으로 붙들고 있는 동시에, 타그마군이 적 영토 깊숙히 전진하여 파괴하는 구조가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해 9세기 경부터 유입되기 시작하는 바랑인 용병대가 정규군화하며 [[바랑기아 친위대]]가 건설되고, 타그마타는 더욱 거대해졌다. 결국 10세기 ~ 11세기경에 들어서면 동로마제국은 총 병력 25만명을 헤아리는 군사 강국의 위상을 회복했다. == [[만지케르트 전투]]와 [[디라히온 공방전]] 이후 == === 아나톨리아 동부 상실과 타그마의 소멸 === [[만지케르트 전투]]이후 제국군은 거대한 피해를 입었다. 1071년, 기병의 주 산지인 시리아 서북부와 아나톨리아 전역을 [[셀주크 튀르크]]에게 잃었고 계속되는 반란에 가용한 인적자원도 메말라갔다. 그러나 타그마군은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 수는 꾸준히 줄고 있었지만, 훗날 [[아르콘토풀레]]의 모태가 될 [[아타나토이]]등이 만들어지는 등 아직 중앙군이 유지되지 않을 수준은 아니었다. 중기 로마군의 종말을 알리는 전투는 1081년에 일어난 [[디라히온 공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바랑기안 가드]]와 스콜라이, 엑스쿠비티, 아타나토이의 남은 병력이 대부분 증발하면서, 7세기부터 내려오던 황실 중앙군의 계보는 단절되게 된다. === [[콤니노스 왕조]]의 재건 === 콤니노스 왕조는 1081년부터 1093년까지 지옥의 3중전선을 겪고있었다. 서쪽에서는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침략자들이, 북쪽에서는 수십만의 [[페체네그]] 기마전사들이, 동쪽으로는 튀르크 계열의 [[룸 술탄국]]과, 같은 튀르크 계열이지만 반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에미르 챠카와 아불 카심이 건설하는 [[투르크멘]] 해적들이 쇠락한 제국을 갉아먹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축소된 제국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새 중앙군이 필요했다. 먼저 그는 [[아타나토이]]의 소수 잔존병들과 수십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죽어나간 아나톨리아 군사 귀족들의 고아들을 모아 [[아르콘토풀레]] 타그마를 건설했고,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에서 모병을 실시해 [[바랑기안 가드]]를 재편성했다. 또한 임시 봉급지불제도인 [[프로니아 제도]]를 통해 마케도니아, 니코메디아, 트라키아 지역에서 중산 농민과 소귀족들로 구성된 타그마들을 모았는데, 이전 역사가들이 황실 근위대의 성격으로 이름붙였던 엑스쿠비티, 누메로이 등등과 달리 단지 모집한 지역의 이름을 딴 군제, 즉 '연대'의 의미로 타그마가 쓰이기 시작했다. [[레부니온 전투]]이후의 연승으로 얻은 많은 타종족들의 전쟁포로들 또한 [[프로니아 제도]]로 녹을 받거나 무인지대화한 아나톨리아에 땅을 받고 재이주되어 타그마로 편입되었는데, 이들이 [[바르다리오타이]], [[투르코폴레스]] 등의 부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타그마 재건은 효과를 보아, 그의 아들 [[요안니스 2세]] 시기에는 4~5만에 이르는 병력으로 시리아 북부를 공격할 수 있을 만큼 중앙군이 성장하였다. 이들의 인적 구성은 중산층 부농들이나 군소 군사 귀족의 자제들, 콘스탄티노플 관리들의 아들들이었는데 초기에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니코메디아에서 중심적으로 모였지만 [* 당시 역사가들이 마케도니아 타그마, 트라키아 타그마 라고 지역명을 적었는데, 거기에 주둔했다기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모인 연대라는 뜻에 가깝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가 나중에 '''동, 서 타그마'''라고 부른것을 볼 때, 재건된 아나톨리아 서부도 큰 모집처중 하나였을것이다. 타그마라는 단어가 친위대나 근위대를 넘어 중앙군의 일정 전투력을 지닌 부대로써 사용되자, 똑같이 '''대대''' 혹은 '''연대'''를 의미하는 '''반돈''', '''알레기온'''이라는 단어 또한 자주보이게된다. == 몰락 == 그러나 중앙 정부의 지원으로 중무장하고 집중화된 타그마는 능력있는 황제의 관리가 없으면 운영되기 힘들었다. 1180년 즉위한 [[알렉시오스 2세]]는 이 거대한 행정체제를 운영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결국 [[안드로니코스 1세]]의 쿠데타로 정권을 넘겼다. 안드로니코스 1세를 필두로 뒤를 이은 앙겔로스 왕조의 무능한 황제들은 타그마 중앙군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고, 병력은 각지에 흩어져서 3~4차 십자군에게 격파당하거나, 반란을 획책했다. 결국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중, 끝까지 저항하던 중앙군은 괴멸되고, 훗날 라스카리스 왕조가 마지막 남은 여력을 쥐어짜 재건할때까지 파괴되어있었다. [[분류:동로마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