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독일의 퓌르스트]] [[분류:독일의 외교관]] [[분류:독일 수상]] [[분류:1819년 출생]] [[분류:1901년 사망]] [include(틀:역대 독일 제국 수상)] ||||<tablealign=right><:>[[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lodwig_zu_Hohenlohe-Schillingsf%C3%BCrst.png]]|| ||<:> '''풀네임''' ||'''Chlodwig Carl Viktor Fürst zu Hohenlohe-Schillingsfürst''' [br] (클로트비히 카를 빅토어 추 호엔로헤실링스 후작[*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추호엔로헤실링스'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 '''출신 정당''' ||무소속|| ||<:> '''생몰년''' ||[[1819년]] [[3월 31일]] ~ [[1901년]] [[7월 6일]] || ||<:> '''재임기간''' ||[[1894년]] [[10월 29일]] ~ [[1900년]] [[10월 17일]] (만 5년 11개월 18일)||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 제국]]의 3대 수상. 이름이 무척 긴 탓에 보통 '''호엔로헤 후작'''(Fürst zu Hohenlohe)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제국의 역대 수상 가운데 가장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 생애 == [[헤센]] 지역의 후작가였던 호엔로헤실링스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 시기 독일 귀족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귀족 자제들은 장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이었는데, 죽어도 [[프로이센 왕국]] 군대에 입대하기는 싫었는지 외교관이 되기를 선택한다.[* 모계쪽으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피가 흘렀는데, 이런 혈통을 활용해서 프로이센 군대를 가는 대신에 [[영국군]]에 입대하려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정말 프로이센 군대에 들어가기는 싫었던 모양(...) ~~일찌감치 자유주의자의 싹이 보였다.~~] 이후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소유였던 [[팔츠]]의 법원에서 근무하면서 법학도 익히게 된다. 이 시기에 당시 독일 부르주아 층에 만연했던 자유주의 사상에 동조하게 됐고, 평생동안 자유주의 성향을 유지하게 된다. 184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았으며 다음해에는 [[바이에른 왕국]]의 의회(Reichsrat)에 참여한다. 그렇지만 딱히 정치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 아주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1848년 혁명]]에서 자유주의 혁명세력들을 옹호하는 한편(물론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코렁탕]] 먹으려고~~) 친척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부탁에 당시 [[독일 연방]] 정세에 관한 편지도 자주 써주었다. ~~영국의 스파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경작지를 관리하는데 정력을 기울인다. ~~땅이 최고의 재산이지 암.~~ 그러다가 1866년 통일 독일의 주도권 문제를 놓고 [[보오전쟁|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정면충돌]]하고 전쟁은 프로이센의 압승으로 7주만에 종결된다.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의 쫀심이 있지, 죽어도 프로이센 밑으로는 안간다.'라며 버텼지만 클로트비히가 간청한 끝에 결국 [[북독일 연방]]과 우호관계를 수립한다.[* 사실 클로트비히의 역할보다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보오전쟁에서 줄 잘못섰다가 망한 [[하노버 왕국]]의 재산을 바이에른 왕국에게 뇌물로 줬던 게 더 컸다.] 어쨌든 1866년 클로트비히는 바이에른 왕국의 수상으로 임명되고 비스마르크와의 긴밀한 협조하에 바이에른 왕국과 남부 독일의 제후국들을 프로이센의 든든한 아군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1871년 [[보불전쟁]] 때 이는 빛을 발한다.[* [[나폴레옹 3세]]는 남부 독일의 국가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 뭐 당시 민중 사이에 만연했던 [[민족주의]] 탓에 지도층이 프랑스의 편을 들었다간 당장 혁명이 일어날 판국이기도 했고.]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 클로트비히는 자유 제국당(Liberale Reichspartei)을 창당하면서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친다.[* 여담으로 자유 제국당은 [[세속국가|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개신교 신자 +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으로, 제국의회에서는 주로 [[가톨릭 중앙당]]에 대항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표적으로 문화투쟁 기간 내내 자유당은 비스마르크의 충실한 딸랑이 역할을 했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클로트비히 이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 또한 통일 당시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비스마르크 역시 클로트비히에게 요직을 맡기는데 1873년부터 1879년까지는 프랑스 대사를 지냈으며, 1880년에는 외무부 장관을 지내다가 1885년에는 [[알자스-로렌]]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클로트비히 본인은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비스마르크가 알자스-로렌 지역에서 펼친 강경책들(가령 강제징집, 가톨릭/불어 탄압)을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비스마르크가 까라면 까라는 대로 움직였고 그 덕에 19세기 후반이 되면 알자스-로렌에서는 독일화가 상당히 진척된다.] 1894년 [[레오 폰 카프리비|카프리비]]가 사임하자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이자 클로트비히의 친척[* 두 사람 모두 [[빅토리아 여왕]]을 외가로 두고 있었다.]이었던 [[빌헬름 2세]]는 클로트비히에게 총리직을 맡을 것을 부탁했고 고심끝에 클로트비히는 이를 수락한다.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Weltpolitik)에 발맞추어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간 철도를 부설하는 [[3B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영국과의 [[건함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또한 근대 한국사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삼국간섭]] 역시 클로트비히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 하지만 이 시기 점차 보수화되고 있던 빌헬름 2세의 내치[* 대표적인 경우로 1894년의 국가 전복 기도 처벌 법안을 들 수 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반정부 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법안. 물론 이 법안은 제국의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클로트비히와 걸맞지 않았고 결국 클로트비히는 1900년에 건강을 이유로 사임해버린다.[* 여담이지만 빌헬름 2세와의 충돌 및 본인의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클로트비히는 이전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나 카프리비와 비교해서는 확연히 정치일선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었다. 심지어 내각회의나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드물어서 독일에서는 그를 일컬어서 그림자 총리(Schattenkanzler)라고 하기도 한다.] 그의 후임으로는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뷜로우]]가 임명됐고 클로트비히는 사임 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1901년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