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f9d537><tablebgcolor=#ffffff,#1f2023><-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27대 대왕[br]{{{+1 忠肅王 / 懿孝大王[br]충숙왕 / 의효대왕}}}'''}}} || ||<bgcolor=#f9d537><colcolor=#670000> '''묘호''' ||<-2>없음 || ||<|2><bgcolor=#f9d537> '''시호''' ||고려 ||'''의효대왕[br](懿孝大王)''' || ||원 ||'''충숙왕[br](忠肅王)''' || ||<bgcolor=#f9d537> '''군호''' ||<-2>강릉대군(江陵大君)[* 참고로 그의 아들인 [[공민왕]] 역시 같은 군호를 받았다.] || ||<bgcolor=#f9d537> '''성씨''' ||<-2>왕(王) || ||<bgcolor=#f9d537> '''휘''' ||<-2>도(燾) → 만(卍) || ||<bgcolor=#f9d537> '''자''' ||<-2>의효(宜孝) || ||<bgcolor=#f9d537> '''몽골식 이름''' ||<-2>왕아라트나시리[br](王阿剌忒訥失里) || ||<bgcolor=#f9d537> '''왕비''' ||<-2>[[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br]경화공주(慶華公主), [[명덕태후]](明德太后) || ||<bgcolor=#f9d537> '''왕세자''' ||<-2>[[충혜왕|왕정(王禎)]] || ||<bgcolor=#f9d537> '''왕자''' ||<-2>용산원자(龍山元子), '''[[공민왕|왕전(王顓)]]''' || ||<bgcolor=#f9d537> '''부왕''' ||<-2>[[충선왕]] || ||<bgcolor=#f9d537> '''모비''' ||<-2>의비(懿妃) || ||<bgcolor=#f9d537> '''능호''' ||<-2>의릉(毅陵) || ||<|2><bgcolor=#f9d537> '''생몰년도''' ||음력 ||1294년 7월 7일 ~ 1339년 3월 24일 || || 양력 ||1294년 7월 30일 ~ 1339년 5월 3일 (44세) || ||<|2><bgcolor=#f9d537> '''재위 기간''' ||음력 ||1313년 3월 갑인일 ~ 1330년 7월 갑자일(17년)[* 1321년부터 1324년까지 3년간 대도에 압송되어 [[고려]] 국왕인(도장)을 빼앗겼다.] || || 양력 || || ||<|2><bgcolor=#f9d537> '''재위 기간'''[br](복위 후) ||음력 ||1332년 2월 갑자일 ~ 1339년 3월 계미일 (8년) || || 양력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제27대 임금.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 원래 이름은 도(燾)였으나 왕으로 즉위 후에 만([[卍]])으로 개명. 자는 의효(宜孝), [[몽골]]식 이름은 왕아라트나시리(王阿剌忒訥失里). [[충선왕]]의 [[차남]]이자 [[한국사]] 최악의 [[폭군]]인 [[충혜왕]]과 개혁 군주인 [[공민왕]]의 부왕. 그리고 충숙왕의 어머니는 충선왕의 제1비 [[계국대장공주]]가 아니고, 제2비인 의비(懿妃)였다. 의비는 [[몽골인]]인데 [[원나라]] [[황족]] 출신은 아닌 듯하고 이름은 예수진(也速眞)이다. 고려의 왕 중에서도 가장 고려 [[혈통]]이 희미한 사람이다. 아버지 충선왕은 [[한몽혼혈|모친이 몽골인이고 부친은 고려인]]이었는데 충숙왕은 모친이 [[몽골인]]이고 부친은 몽골과 고려 혼혈이었다. [[충렬왕|친할아버지]]만 [[고려인]]이고 [[제국대장공주|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3명 모두 [[오리지날]] 몽골인이다. 그래서 충숙왕은 [[생물학]]적으로는 몽골인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어|고려말]]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일 정도로 주로 원나라에서 살던 아버지 충선왕과는 달리 고려에 머물며 통치를 했고 [[몽골풍|몽골 옷을 입고 몽골식 예법]]을 올리는 아들 충혜왕을 "네 [[아비]]와 [[어미]]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너는 그 꼴이 뭐냐"며 꾸짖은 이야기로 보아서 비록 아버지와 아들보다도 고려인 혈통이 옅었지만 자신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첫 번째 재위 == ||<-3><tablebordercolor=black><bgcolor=#fedc89><colcolor=#670000><tablealign=center> '''역대 강릉(江陵)의 가신''' || ||<bgcolor=#fedc89> '''1대''' ||<bgcolor=white>'''강릉대군(江陵大君)''' ||<bgcolor=white>'''왕만(王卍)''' || ||<bgcolor=#fedc89> '''2대''' ||<bgcolor=white>'''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bgcolor=white>[[공민왕|왕전(王顓)]] || ||<bgcolor=#fedc89> '''3대''' ||<bgcolor=white>'''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bgcolor=white>[[우왕|왕우(王禑)]] || 1299년 강릉군에 봉해졌고 이후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진봉되었다. 그의 친형인 [[세자]] 왕감이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1310년 부왕인 충선왕에 의해서 살해당한 뒤에 [[후계자]]가 되었으며 1313년 원나라의 [[심양왕]]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이 책임감 없고 이상한 아버지 충선왕은 평생 아들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결정을 남겼다. 안 그래도 충선왕이 [[상왕]]으로 건재해서 충숙왕의 [[왕권]]이 약한 상황에서 충선왕이 1316년 자신의 원나라 작위인 심양왕 자리와 고려의 세자 자리를 이복형 강양공[* [[충렬왕]]과 고려인 [[정화궁주]]의 아들. 이름은 왕자.]의 차남인 연안군 [[왕고(고려)|왕고]]에게 물려준 것이다. 물론 온전한 자의가 아닌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은 탓에[* [[제국대장공주]]나 그 소생인 충선왕이 아니었다면 고려의 왕위는 당연히 강양공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충선왕 입장에서 심양왕 자리를 조카에게 준 건 나름 미안한 마음에 챙겨준 [[보상]] 비슷한 것이었을 수 있다.] [[조카]]에게 물려준 듯 하나 이는 충숙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나아가 고려 [[조정]]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명목상으로 포괄하게 된 [[요동]]의 [[영토]] 역시 사라졌다. 왕고는 고려 국왕 자리에 [[욕심]]을 품고 지속적으로 사촌인 충숙왕을 모함했다. 결국 왕이 [[주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원나라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왕고의 모략 때문만이 아니라 충숙왕의 아내인 [[복국장공주]]가 갑자기 [[승하]]한 일이 있었는데 이게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피흘릴 정도로 두들겨 패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원나라에서 문제삼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올 때부터 몸이 이미 좋지 않은 상태였으며, 애당초 두 부부의 사이는 좋지 않아서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심지어 왕고는 1321년 [[원영종(5대)|원나라 영종]]의 명령으로 충숙왕이 압송되자 2년간 고려 국왕을 [[자칭]]하기까지 했다. == 아들에게 양위 == 이런 현실 속에서 왕이 잘 해보겠다는 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싫증이 난 충숙왕은 왕 노릇 못 해먹겠다며 자신을 위협하던 심양왕 왕고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쳤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 이전에도 왕고의 형제들에게 작위를 주는 등 제법 유화적인 자세로 나갔었다. 왕고는 지속해서 충숙왕을 모함했으며 심지어는 원나라 [[황제]]에게 '''아예 그냥 고려를 [[성(행정구역)|성]](省)으로 만들고 원나라가 직접 통치하죠'''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를 '''[[입성책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입성책동은 원나라 내부의 굳이 그럭저럭 안정된 정국에 괜히 불씨를 던질 필요가 있냐는 반대 의견과 [[이제현]]의 노력 등으로 무산되었다. 이 때 고려가 원나라의 직할령 시도를 방어하는데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충렬왕의 [[장인]]인 [[쿠빌라이 칸]]의 명령인 '''세조구제'''. 실제로 원나라가 몇 차례나 고려를 완전 [[합병]]하려 할 때마다 이 세조구제는 가장 확실한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도 왕고와의 알력다툼이 끊이지 않자 1330년 아들 왕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이 바로 '''최악의 폭군인 충혜왕이다.''' == 복위 후 2번째 재위 == 충혜왕의 [[막장]] 짓을 보다 못한 원나라는 결국 2년만에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다시 충숙왕을 [[복위]]시켰으나 정치에 뜻을 잃은 충숙왕은 신하도 만나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로 소일하다가 8년만인 1339년 3월 승하했다. 향년 46세.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 원나라의 시호를 쓰지 않는 경우에는 '의효왕', 고로 '의왕(懿王)'으로 줄여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참고로 [[의종(고려)|의종]]과는 한자가 다르다. 그나마 충숙왕에게 다행한 일은 [[충정왕]]이 폐위된 후 차남인 [[공민왕]]이 즉위했다는 점. 그나마 공민왕도 초기에는 반원 개혁을 일으키며 고려를 부흥시키는데 노력했지만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의 승하 뒤 폐인이 된채 암군으로 타락해버렸고 끝내 시해를 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 평가 == 아버지 [[충선왕]]의 이해 못할 짓으로 뭘 해 보고 싶어도 해 보지 못하고 의욕 없이 왕위에 있었으며, [[원나라]]에 자주 끌려다니며[* [[충렬왕]]과 [[충선왕]]은 제 발로 원에 자주 들락거렸으나, 충숙왕이 원에 갈 때에는 강제 호출된 경우가 많았다.] 귀찮은 재위 기간을 보낸 임금. 하지만 업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1318년의 업적이 특히 많다. [[원나라]]에 보내는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했으며, 당시 백성들의 큰 고통이었던 [[공녀]]나 환관들을 원으로 보내는 것을 줄여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제주도]]의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按撫)하게 하였다. 같은 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문세족]]이 점령한 땅을 색출하여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또, 채무에 있어서 [[고리대금]]업을 막아, 그 이자가 원금에 상당할 때에는 그를 정지시키는 등 단속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안향]]을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화자거 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 執田民推考都監)을 설치하였다. 최소한 아예 고려 왕이라는 책임감이 부족해 아예 대도에서 원격 통치를 하며 자신의 학문 사업과 원 제국의 정치 싸움에만 몰두하던 [[충선왕]]보다는 충숙왕의 치세는 그나마 나았다. 또 여러 혼란이 많았지만 재위 기간이 25년으로 원나라에 끌려간 기간을 빼면 20년, [[충혜왕]]에게 물려준 기간을 더하면 22년 ~ 27년으로 길다는 것도 특기할 만은 하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보다 단명했지만 말이다. 왕 개인적으로는 글씨와 문장에 두루 능했으며 성품은 침착,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하지만 그 평가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애초에 원나라 간섭기의 모든 군주들이 그렇듯 뭘 해 보고 싶어도 할 수 없던 것이 현실이었지만. [[신진사대부]]를 발탁시킨 충선왕과 충목왕 사이에서 충숙왕은 재위가 길었음에도 이런 친위 세력을 기르려던 흔적을 보이지 못한다. 거기에 아들 [[충혜왕]]의 막장 짓 때문에 아들을 자주 혼냈다고 전하는데, 아들에 대한 스트레스도 그의 단명을 앞당겼을지도. [[최영]]은 우왕의 난봉짓을 보다 못해 "충숙왕도 놀기를 좋아하셨지만 그래도 농번기를 피해 놀아서 백성들 원망을 듣지는 않으셨는데 지금 전하는 시도 때도 없이 놀아제끼니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간언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충숙왕이 예천군 권한공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을 '거사'라고 칭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가 이 고사를 본따 당시 북쪽 변방에 나가 있던 [[정도전]]에게 태조 자신의 호인 '송헌거사'라는 발신자명으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이성계의 정도전에 대한 두터운 신임이나 임금과 신하가 사적으로도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더라 하는 보기 좋은 미담으로 소개되어 있기는 한데, 정작 그 고사에 나오는 권한공은 채홍철, 유청신 등과 함께 심왕 왕고에게 붙어서 충숙왕에게 고려의 왕위를 왕고에게 넘겨주라고 권하거나 책성입동에 찬성했고 충숙왕에 의해 유배까지 갔던 인물이다. 여러 모로 자식 농사에는 완전히 실패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장남 [[충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삼남 [[공민왕]]도 초반에는 잘했다가 나중에는 암군으로 타락했으며 차남 용산원자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큰손자 [[충목왕]]은 명군의 자질이 보였으나 요절했고, 둘째 손자 [[충정왕]]과 셋째 손자 [[우왕]]도 좋은 임금이 되지는 못했다. == 가족관계 == * 제1비 :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이린친발라(亦憐眞八刺) - 원나라 영왕(營王) 에센테무르(也先帖木兒,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손자)의 딸 * 제2비 :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금동(金童) - 원나라 위왕(魏王) 아무가(阿木哥, 원 순종 [[다르마발라|]]의 아들)의 딸[* 신원사에 따르면 [[공민왕]]의 처 [[노국대장공주]]가 위왕 아무게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원사에 위왕 아무게가 충숙왕 때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위왕 자리를 물려받은 차남 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즉 [[노국대장공주]]의 고모인 셈이다.원 [[무종(원)|무종]]과 원 [[인종(원)|인종]]의 이복형이지만, 훗날 이들에게 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탐라로 유배되고 죽는다.] * 차남: 용산원자(龍山元子) * 제3비: 경화공주(慶華公主)[* 숙공휘령공주라고도 한다.] 바얀후트(伯顔忽都) - 원나라 여인 * 제4비 : [[명덕태후|덕비 홍씨]] - 남양 홍씨 홍규의 다섯째 딸[* [[충선왕]]의 후궁 순화원비 홍씨(順和院妃 洪氏)의 친동생이다. 즉 이들은 부자지간이면서 동서(同婿)지간이 된다.] * 장남 : [[충혜왕]] * 삼남 : [[공민왕]] * 후궁 : 수비 권씨(壽妃權氏) - 안동 권씨 권렴의 딸 == 이야깃거리 == === 교황 요한 22세가 충숙왕에게 보낸 편지? === [[파일:external/img.segye.com/20160929001559_0.jpg]] 2016년 [[바티칸]] 비밀문서고에서 1333년에 당시 [[교황]] [[요한 22세]]가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60929125514132&p2m=false|충숙왕에게 보낸 서한의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서한이 충숙왕에게 도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께서 그 곳([[고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대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구절이 있기에 당시 고려에 소수이든 다수이든간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또한 영상에서 [[라틴어]] 번역자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려 왕 당신은 [[야훼|하느님]]의 좋은 종(Good Servent)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낸 신자들을 환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편지 내용을 요약해주는데, 만약 '우리가 보낸'이라는 게 번역자가 임의로 붙인 내용이 아니라면,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가 [[고려]] 땅을 밟은 셈이 된다.[* 당시 [[원나라]] 수도 대도에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파견되어 있었으므로, [[고려]]에 가톨릭 신자가 가는 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임의로 붙인 내용이라면,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몽골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고려에 거주하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가톨릭이 아니라 네스토리우스파라고 하더라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다만 해당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슨 [[서유럽]]과 [[고려]] 간에 교류가 있어서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유럽의 금속활자에 영향을 줬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신빙성이 낮으며 서유럽의 금속활자는 동양의 금속활자와는 다른 독자적인 체제를 통해 만들어 졌기에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해당 문건은 고려 시대 당시 한반도 내 크리스천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로만 봐야 한다.[[http://nestofpnix.egloos.com/7268088|해당 기사 오류 지적]][* 여담으로 이 시대에는 아예 '''고려인 [[무슬림]]'''도 있었다. 개경에는 몽골에서 건너와 고려에 체류하던 위구르인들이 지은 [[모스크|마스지드]]가 있었고 당시에는 그곳을 '예궁(禮宮)'이라 불렀다고. (출처 : 조선불교통사)] 하지만 "위의 편지가 [[고려]] 충숙왕에게 보낸 것이라는 주장은, [[라틴어]]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반박 주장이 나왔다. 편지를 받는 '''Regi Corum'''의 '''Corum'''을 고려인의 복수로 보는 건 [[라틴어]]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편지를 받는 당사자는 라틴어 문법으로 보든 당시 정황으로 보든 고려 충숙왕일 수 없다는 것이다.[[http://hankookilbo.com/v/6030f48827af445bad570ae0d5fadd58|교황이 고려 왕에게 편지? 잘못된 해석]] 해당 논문으로 들어가보면 '''"Corum의 문법적인 형태를 고려해 볼 때, Corum은 Ci이고 이는 Khitan에 더 근접해 있으며, Khitan은 그런데 Chigista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Sece de Chigista를 Seecede Chingista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도 [[고려]]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편지를 받는 '''Regi Corum'''은 고려 충숙왕이 아니라 [[원나라]] 황제이거나 서방 칸국의 칸들 중 하나로 보인다. ===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 [[코에이]]의 [[원조비사]]에서 시나리오 3 '원조의 성립'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는데, 이 시나리오의 시작 년도는 '''1271년'''[* 역사적으로 이 때 고려 국왕은 [[원종(고려)|원종]]. 일본 원판에서는 국왕이 원종이지만 한국에 수입되면서 비스코에서 몽고와 관련된 인물들로 고려 측을 싹 갈아버려서 충숙왕이 대신 등장한다.]으로 태어나기 전에 고려의 국왕이 되어 있다. 덩달아 아들인 [[충혜왕]]과 [[공민왕]]도 등장하며 수하 무장으로 [[최영]]과 [[이성계]]가 있다. --뭐야 이거.-- 능력치가 그저 그렇다 보니 많은 유저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충숙왕을 죽이고]]''' 아들인 공민왕을 [[아서스 메네실|후계자로 해서]] 플레이하기도 했다고. 현실에서도 [[안습]]이었는데 [[테레나스 메네실|게임에서까지 안습.]] [[파일:충숙왕(신돈).png]] * MBC HD 창사 특집 드라마 <직지>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이정길]] [각주] [[분류:고려 국왕]][[분류:원나라의 부마]][[분류:퇴위한 군주]][[분류:1294년 출생]][[분류:1339년 사망]][[분류:몽골계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