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imgnews.naver.net/0003567504_001_20170629195924398.jpg|type=w540]] 2017년 6월 29일 [[한화 이글스]]와 [[kt wiz]]의 [[청주구장]] 경기에서. 오른쪽이 추평호 심판이다. ~~[[강경학]]의 뒤태~~ ||<-2><bgcolor=#000000> {{{#ffffff KBO 심판 No.8}}} || ||<-2><bgcolor=#ffffff,#191919> {{{#000000,#e5e5e5 추평호 (秋坪鎬 / Pyeong-ho Choo)}}} || || 생년월일 || 1973년 2월 8일 || || 출신지 || [[전라남도]] || || 학력 || 목포영흥고-[[영남대]] || || 포지션 || 외야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1995년/신인드래프트|1995년 2차 6라운드]] ([[해태 타이거즈|해태]]) ||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95~1997) || [목차] == 개요 == 전 [[해태 타이거즈]]의 야구선수이자 현 [[KBO 리그]]의 심판위원이다. == 상세 == 그가 다녔던 목포영흥고등학교[* KBO 심판 [[문승훈]]과 前 [[KIA 타이거즈]] 투수 [[최향남]]이 그의 선배이다.] 야구부는 1982년 프로야구의 출범과 더불어 창단되었는데, 이는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인 전남 지역에 두번째로 창단된 야구부였다. 이미 같은 목포지역에 [[목상고등학교|목포상고]] 야구부가 있었고, 이윽고 1986년에 [[순천상업고등학교 야구부|순천상고]]에도 야구부가 창단되었던 데다가, 같은 도내 [[광주광역시|광주]]의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 [[진흥고등학교 야구부|진흥고]] 등 이미 쟁쟁한 팀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1986년도까지는 전국대회 본선에 단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다. 그런데 1985년에 목포상고가 성적 부진으로 결국 야구부를 해체하였고, 뒤이어 1986년 11월에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되게 되면서, 전남 지역에는 경쟁자가 순천상고만 남게 되었고, 두 학교 중 하나는 반드시 본선행 티켓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였다. 영흥고는 1988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황금사자기]]에서 8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이후 1993년까지 나름대로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마저도 순천상고 또한 1989년에 야구부를 해체하게 되면서, 1994년에 [[순천효천고등학교 야구부|순천효천고 야구부]]가 창단되기 전까지는 전국대회 본선에 무혈입성을 하는 황금기를 누렸다. 추평호는 이런 황금기의 시발점이었던 1988년에 입학하게 되는데, 외야수로 출전하여 그해 [[황금사자기]] 16강, 1989년 [[청룡기]] 16강 · 황금사자기 16강 ·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봉황대기]] 32강, 1990년 황금사자기 16강 · 봉황대기 16강 등의 실적을 내는데 크게 기여한다. 이러한 성적을 보여주면서, 1989년 [[해태 타이거즈]] 연고지명에 1명이 뽑힌 것을 시작으로 [[한국프로야구/1990년/신인드래프트|1990년 신인드래프트]]에서 그의 1년 선배 [[최향남]]을 비롯한 6명이 [[해태 타이거즈|해태]]에 입단하였고, 추평호가 대학을 졸업한 [[한국프로야구/1995년/신인드래프트|1995년 신인드래프트]]까지 무려 영흥고에서는 해태 선수를 20명이나 입단시킬 수 있었다. 영흥고 졸업 후 [[영남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비록 대학에서 큰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1년 후배였던 [[곽현희]], [[전병호]] 등과 선배인 [[김정민(야구)|김정민]], [[이민호(1969)|이민호]] 등의 활약으로 1992년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노림수가 있었던 선수였기에 종종 홈런을 때려내어 경기를 뒤집는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후 영남대를 졸업하고 1995년 [[해태 타이거즈]]에 2차 6라운드에 지명되어 입단[* 입단 당시 계약금 1,500만원, 연봉 1,200만원으로 총 2,700만원에 계약하였다고 한다.]하였다. 내야수로 지명받았으나, 입단 이후에는 주로 외야수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입단 후 아무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해태의 외야진에는 [[이순철]]과 [[이호성]] 등이 전성기는 제법 지났지만 제 몫을 해주고 있었고, [[박재용]]은 지명타자로서, [[박재벌]]과 [[김재덕(1973)|김재덕]], 김병조 등은 주전급은 아니지만 쏠쏠한 기여를 하고 있었다. 또한 1996년에는 [[동봉철]]이 삼성에서 트레이드되었고, [[장성호]]가 입단하였다. 1997년에는 [[김창희(야구)|김창희]]가 입단하고 [[조현(1976)|조현]]이 LG에서 트레이드되어 오는 등 여러모로 악재가 겹쳤다. 그 결과 추평호는 해태에서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고, 결국 1995년에는 단 2경기 나와 2타수 0안타, 1997년에는 6경기 나와 3타수 0안타 3삼진 이라는 몹시 [[안습]]한 성적을 남기고 1997년, 비로소 방출되어 은퇴하였다. 그 후 2002년 4월부터 [[KBO 리그]]의 심판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역대 최장이닝 경기인 [[두산 베어스/2008년/9월/3일|2008년 9월 3일 두산-한화 경기]] 당시 2루심이었고, 역대 최장시간 경기인 [[KIA 타이거즈/2009년/5월/21일|KIA-LG 경기]] 당시 주심이었다.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 윤상원,김성철,오훈규와 같이 한국 대표 심판으로 참여 하였다. [[KBO 올스타전/2019년|2019년 KBO 올스타전]] 주심을 맡았다. 여담으로 [[오심 및 편파판정|오심]]으로 유명한 심판이다. ~~KBO에 오심으로 안 유명한 심판이 어딨겠냐만....~~ 대표적으로 2007년 4월 22일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연장 12회말 2아웃 상황에서 [[이대형]]이 평범한 2루수 앞 땅볼을 때렸으나, 이대형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1루에 쇄도하였으나 결국 아웃 판정을 내렸다. 이때 느린 화면을 보면, 1루수의 포구보다 이대형의 손이 먼저 베이스에 닿았음을 알 수 있지만, 심판의 [[퇴근본능]]이 더 크게 작용했는지 아웃 판정을 내렸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696434#layerClose|참조]] [[http://blog.naver.com/harim811111/20207630052|당시 상황을 다룬 블로그 글]] 2020년 10월 2일 기아와 두산전 주심을 보면서 두산 알칸트라 공은 존 바깥쪽 공도 스트라이크를 잡아주지만 KIA 양현종은 존에 걸치는 공도 안잡아주면서 멘탈붕괴의 1차적 원인이 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외야수]][[분류:1973년 출생]][[분류:우투우타]][[분류:KBO 리그 심판]][[분류:해태-KIA 타이거즈 은퇴/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