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Choi_Chang-ik.jpg]] 崔昌益 [[1896년]] ~ [[1957년]]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 [[북한]]의 정치인. [[1896년]] - [[1957년]]. 그의 아내는 [[허정숙]]이다.[* 1930년대 후반 [[옌안|연안]]에 있던 시절 결혼했으나 1946년 최창익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이혼했다고 한다. 이후 허정숙은 8월 종파사건 재판에서 최창익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다.] 이명으로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健宇)가 있다. == 항일 운동 == [[1896년]]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http://kpsa.or.kr/modules/bbs/index.php?code=book&mode=view&id=886&page=13&___M_ID=118&sfield=&sword=|#]] 출신이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20년대]]부터 [[조선공산당]] [[ML파]]로서 활동하기도 했고 [[1930년대]]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합류했다 그를 떠나 연안으로 가서 [[김두봉]]과 함께 [[중국공산당]] 지휘 하에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해 활동했다. 조선독립동맹에서는 위원장 김두봉 밑에서 한빈과 함께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 광복 이후 == [[북한]]으로 입국했으며 정부 수립 이후 부수상(재정상) 등의 요직을 맡았다. 북한 체제 수립 과정에서 최창익은 이론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이 곧 계급투쟁이라는 북한식 사회주의 노선을 정립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그는 [[연안파]]의 최고실력자[* 사실 연안파는 특정한 리더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결속력이 약했다. [[김두봉]]의 경우 국가수반이기는 했지만 학자풍의 상징적 원로에 가까웠고 최창익은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에 나섰던 노혁명가로서의 경력 및 내각 부수상, 당 중앙위원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실력자로 통했다.] 로서 [[김일성]]을 실각시키고 본인이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려는 계획을 짰고 이 과정에서 중국, 소련과 접촉하기도 했다. 즉, 8월 종파 사건의 최대 배후. 그러나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미코얀, 중국의 [[펑더화이]]가 북한으로 와 [[김일성]]에게 그의 복권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성]]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눈치보다 결국 최창익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1957년 감옥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 평가 ==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은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사건'으로도 불리며 현재까지 최창익의 이름은 종파분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출신에 1920년대 [[ML파]] 활동부터 1940년대 [[조선독립동맹]] 활동까지 공산주의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여러모로 [[김일성]]의 라이벌 격이었던 인물이지만 치밀한 준비 없이 회의를 통해서 김일성을 끌어내리겠다는 안일한 인식과 외세에 의존했던 점 등은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다. [[분류:1896년 출생]][[분류:온성군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분류:북한 내각 부총리]][[분류:195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