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최종응(崔鍾應) || || 이명 ||최근응(崔謹應) || || 호 ||금전(琴田) || || 본관 ||[[경주 최씨]][* 광정공파 31세손.[[http://weekly.hankooki.com/lpage/woman/200709/wk2007091912140037110.htm|#]]] || || 생몰 ||[[1871년]] [[8월 21일]] ~ [[1944년]] [[1월 24일]] || || [[출생지]]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둔산동[br](현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둔산동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234569&categoryId=35256|옻골마을]])[* 인근의 봉무동과 함께 [[경주 최씨]] 광정공파 집성촌이다. 출생지인 382번지에는 현재 그의 생가인 [[http://www.koreatriptips.com/accommodation/2377728.html|금전고택]]이 자리해 있다.]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최종응은 1871년 8월 2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둔산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음력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86_1_0026973&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고일청]](高一淸)[* 1912년 일제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을 받고 일제강점기 초 관료를 지내다가 [[3.1 운동]] 직후 퇴직하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임시정부에서 재무부 비서국장, 임시공채관리국장,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27년 '''임시 정부기금 5만 원을 횡령'''--[[레게노]];;--해 독일로 유학가서, 베를린 대학 법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다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이리 갔다 저리 갔다 안 힘드나--]은 내무총장 [[이동녕]]과 임시의정원 의원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420|최창식]](崔昌植)의 소개장을 들고 비밀리에 입국하여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289|윤영선]](尹榮善)[* 이명 尹喆]을 방문하여 조선 내에 장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을 설치할 것이라며 「선정대사(宣政大使)」라는 신임장과 「지방행정조직서(地方行政組織書)」·「지방행정관리통칙서(地方行政官吏通則書)」·「경고부내대소민(警告部內大小民)」이라는 제목이 붙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교서 등을 보여주며 도움을 청하였고, 윤영선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 조직서들에 의하여 각 도에 선정사(宣政使) 및 각 군면에 관장(管長)을 두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다.[[http://db.history.go.kr/id/su_006_1921_06_03_0120|#]] 이때 최종응은 경상북도 선정사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여 동지 고정일(高政一)·윤영선·[[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951630|이태훈]](李泰勳)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조달기반을 조성하였으며 그해 9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순방하며 자산가들의 자산명부를 작성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해 11월에는 경상북도 [[영천시|영천군]] 금호면(현 금호읍) 오계동에 사는 조석환(曺奭煥)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8백원을 받아 임시정부 파견원 고일청[* 또는 고일치(高一致)]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1년 2월 경상북도 영천군 청경면(현 고경면) 상리동에 사는 손계창(孫啓昌)과 [[칠곡군]] 지천면 금호동에 사는 윤병돈(尹炳敦) 등 경상북도에 거주하는 부호들에게 2천원 내지 5천원을 요구하는 군자금 납입명령서를 송부하고 손계창과 윤병돈으로부터 300원씩 받아 이태훈에게 전달하였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31038|#]] 이 일로 인하여 그해 6월 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http://db.history.go.kr/id/jssy_002_0120|#]] 1922년 3월 30일 소위 공갈 및 제령 제 7호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은거하다가 1944년 1월 24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최씨]][[분류:동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871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