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회령시 출신 독립운동가, 崔正洙 == || 성명 ||최정수(崔正洙) || || 이명 ||강학순(姜鶴順)·최학순(崔鶴順) || || 생몰 ||[[1896년]] ~ ? || || [[출생지]] ||[[함경북도]] 회령군 풍산면[* 구한 말 회령군 풍산면 일리 상수동·보하동·천평동·맹가동·사동·봉의동·중도동 → 1914년 회령군 창두면 풍산동 → 1949년 회령군 창두면 풍산리 → 1952년 회령군 풍산리 → 1991년 회령시 풍산리.][br](현 함경북도 [[회령시]] 풍산리)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최정수(崔正洙)는 1896년 함경북도 회령군 풍산면(현 회령시 풍산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제1남지방부(第1南地方部) 통신원으로 중국 [[허룽|화룡현]] 및 회령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해 음력 7월 [[유봉춘]](兪鳳春)·[[박준학]]·황운흥(黃雲興) 등과 함께 밀정 윤달수(尹達壽) 처단에 참여하였으며, 음력 8월 1일에는 회령군 팔을면 창효동에서 동민(洞民) 18명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다음날인 2일에도 팔을면 원산동에서 최태항(崔泰恒)·강기용(姜璣鎔)·최병윤(崔秉淵)·윤영준(尹永俊)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차출하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그해 8월 20일경에는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955554|이용학]](李龍學)·[[한창준]] 등과 함께 화룡현 사기동(砂器洞)에서 밀정 김덕기(金德基)를 심문하고 부근의 토성산복(土城山腹)으로 연행하여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1년 7월경 체포되었다. 1922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살인, 강도죄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41&evntId=0034971160&evntdowngbn=Y&indpnId=000000358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1년 8월 18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홍원군 출신 독립운동가, 崔正守 == ||<-2><tablealign=right><bgcolor=white,#191919> [[파일:최정수(홍원 독립운동가).jpg|width=300px]] || || 성명 ||최정수(崔正守) || || 이명 ||강학순(姜鶴順)·최학순(崔鶴順) || || 본관 ||[[전주 최씨]] || || 생몰 ||[[1922년]] [[1월 20일]] ~ [[1990년]] [[12월 26일]] || ||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남당리[* 인근의 장정리와 함께 [[전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팔용]]과 [[도명수]]·[[도상봉]]도 이 마을 출신이다.][br](현 함경남도 홍원군 남천노동자구)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최정수(崔正守)는 1922년 1월 20일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남당리(현 홍원군 남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토요대학]]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명목에 의해 일본군 평양사단 내 42보병부대에 입대하였다.[* 당시 일본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그해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그는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835|김완룡]](金完龍)·[[박성화(독립운동가)|박성화]]·[[전상엽]]·[[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845|김윤영]](金允永) 등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고 그해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 내 각 부대의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이때 최정수는 학병항쟁 조직의 제1지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당초 학병항쟁의 계획으로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국-[[만주국]]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 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계획을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 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도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6월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가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 12월 26일 별세하였다. [각주] [[분류:동명이인/ㅊ]][[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회령시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홍원군 출신 인물]][[분류:전주 최씨]][[분류:1922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