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라삼최)] ||<-2><tablealign=center><bgcolor=#191970><table bgcolor=#fff,#191919><tablebordercolor=#191970> '''{{{#white 나말여초의 지식인[br] {{{+2 최언위}}}}}}''' || ||<bgcolor=#191970> '''{{{#white 시호}}}''' ||'''문영공(文英公)''' || ||<bgcolor=#191970> '''{{{#white 향직 품계}}}''' ||'''정광(政匡)'''[* 사후 추증. 2품 2등위.] || ||<bgcolor=#191970> '''{{{#white 본관}}}''' ||[[경주 최씨]](慶州 崔氏) || ||<bgcolor=#191970> '''{{{#white 이름}}}''' ||신지(愼之) → 언위(彦撝) || ||<bgcolor=#191970> '''{{{#white 아들}}}''' ||최광윤, 최광원, 최행귀, 최행종 || ||<bgcolor=#191970> '''{{{#white 출생}}}''' ||[[868년]] [[신라|신라국]](新羅國) [[경주시|금성]](金城) || ||<bgcolor=#191970> '''{{{#white 사망}}}''' ||[[944년]] [[고려|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개주(開州) || [목차] == 개요 == [[후삼국시대]]의 인물. [[신라]]와 [[고려]]의 문인 겸 관료.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우]]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렸다. == 상세 == [[6두품]] 최치원의 11살 어린 [[사촌]]동생으로 [[경주 최씨]] [[가문]] 출신이다. 886년 18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895년 [[중국]] [[당(통일왕조)|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했는데 신라와 [[발해]]의 은근한 [[경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당나라 빈공과 수석은 신라 출신 학생들이 거의 싹쓸이를 하는 수준이었는데 1번은 발해 출신 오소도(烏炤度)가 신라 학생 이동(李同)보다 높은 등수를 받아 신라를 이겼다.[* 최치원은 이를 가리켜 신라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깠다.] 이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당나라 빈공과에 응시했는데 최언위가 오광찬보다 등수가 높았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는 오광찬의 등수를 최언위보다 높여줄 것을 당나라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짓밟혔던 신라 학생들의 [[자존심]]을 최언위가 살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909년 귀국하여 [[효공왕]]에게 집사성시랑(執事省侍郞)[* 집사성의 [[차관]]. 집사성은 신라 13부 정부 기관 중 하나.] -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 서서원 소속 직위. 서서원은 신라 [[국왕]]의 명령을 문서화하는 부서.] 직위들을 받아 역임한다. 최언위는 일찍이 [[벼슬]]을 버린 사촌형 최치원과 달리 오랫동안 벼슬을 지냈는데 특히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과 최언위의 딸이 [[혼인]]을 맺어 [[사돈]] 관계였을 정도로 크게 [[출세]]했다. 918년 [[태봉]]의 시중 [[태조(고려)|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 최언위는 경주 최씨 가문을 이끌고 왕건에게 항복했는데 왕건은 최언위를 크게 우대해 태자사부(太子師傅)[* 고려 초기 [[수춘궁|태자부]]의 직위로 보인다.] 벼슬을 제수했다.[* 당시 고려의 [[태자]]는 [[혜종(고려)|왕무]]였다.] 성품이 온후하고 신라 삼최로 일컬어질만큼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당시 고려의 많은 [[호족]] 가문들이 최언위를 존경했다고 한다. [[만월대|궁원(宮院)]]의 액호[* 額號 : 대문에 걸어놓는 현판.]를 모두 썼으며 높은 직위로 [[승진]]했다.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를 썼는데 당시 관작은 대상(大相) - 검교[[상서좌복야]](檢校尙書左僕射)[* 검교는 해당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걸 명시하기 위해 붙힌다.] 겸(兼) 어사대부(御史大夫)[* [[어사대]]의 장관.] - 상주국(上柱國)[* 최고위 훈위. 훈위는 실무직이 아닌 명예를 치하하기 위한 훈장에 가깝다.] -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 원봉성 소속 직위.]였다. 이후 944년 천수를 다하고 죽을 때까지 관직에 있었으며 관직이 평장사(平章事)[* 고려의 문산계 품계로는 정2품 직위이며 향직 품계로는 몇 품인지 알 수 없다.]에 이르렀다. 최언위의 최종 관작은 대상(大相)[* 향직 품계. 4품 1등위.] - 원봉대학사(元鳳大學士)[* 원봉성 소속 직위. 원봉성은 신라의 서서원과 같은 부서.] - 한림원령(翰林院令)[* 한림원의 장관. 한림원도 원봉성과 비슷한 부서.] - 평장사(平章事)[* 내의성의 차관. 내의성은 [[중서문하성]]의 전신.]였다. 사후 혜종에게서 정광(政[* 正의 오기로 보인다. [[고려사]] 선거지에는 바를 정 자로 나오기 때문.]匡) 향직 품계와 [[시호]] 문영(文英)을 추증받았다. == 기타 == === '대고려왕답견훤서'의 저자? === 견훤과 왕건이 주고받았다는 국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견훤을 대신하여 고려왕에게 보내는 글)' 및 '대고려왕답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 고려왕을 대신하여 견훤에게 답하는 글)'로 알려진다. 간략한 고대사 기록에서 본 문장은 상대적으로 아주 자세히 사료에 전해지는데, 그만큼 두 글이 명문임을 반증한다.[* 출처는 [[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918&categoryId=62145&cid=62145|열전 견훤편]], [[고려사]] 세가 태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788&categoryId=62161&cid=62131|10년(92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789&categoryId=62161&cid=62131|11년(928)]] 기사.] 다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상세한 내용과는 달리 필자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그나마 [[동문선]] 제57권에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의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0570_010_0020|필자를 최승우]]라 명시한 반면, 대고려왕답견훤서의 필자는 '''무명씨'''로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0570_010_0030|소개]]하고 있으니 최언위 집필설은 불명확한 실정이다. == 가족 관계 == * 아들 * 최광윤(崔光胤): [[후진]](後晉)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붙잡혔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오히려 거란에서 관직을 주어 등용하였다고 한다. 후일 [[여요전쟁|거란의 고려 침공]]을 예측하여 본국에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정종(고려 3대)|정종]]의 광군 설치에 일조하였다. * 최행귀(崔行歸): [[오월]](吳越)에서 유학하여 벼슬을 지냈다. 고려로 귀국해 관직을 제수했지만 광종의 대호족 숙청에 휘말려 죽었다. * 최광원(崔光遠) * 최행종(崔行宗) * 손자 * [[최항(배향공신)|최항]](崔沆): 8대 현종의 배향공신. 최광원의 아들이다. == 매체 == 대중적으로 유명한 [[최치원]], [[최승우]]와는 달리 [[인지도]]가 낮다. 오히려 최언위를 대신해 [[최응]] 혹은 [[최지몽]]을 신라 삼최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최승우, 최응, 최지몽이 비중있는 역할로 나왔고 최언위는 신라 삼최로 [[이름]]만 간간이 언급되기만 해서 그런 듯하다. [[태조 왕건]] 16화 17분 30초 무렵에는 '이 [[작품]]에서 최언위는 나중에 등장을 한다'라며 직접 등장할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다. 최언위 정도라면 최승우의 [[라이벌]]이거나 모시는 [[주군]]은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의 [[벗]] 정도의 비중을 가져야 할텐데 이 포지션을 최응이 가져갔고 그렇다고 명색이 신라 삼최 중 1명을 그냥 일반 신료 정도로 묘사할 수도 없으니 나오지도 못한듯. 태조 왕건의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서도 이름만 언급 되었다. 장남이 최광윤도 거란에 억류되어있던터라 언급만 되는 정도이며, 차남인 최행귀([[임병기]] 분)가 직접 등장하였다. 대고려왕답견훤서는 누가 썼는지는 나오지 않으며 고려는 최치원이 썼다는 거짓말로 백제조정을 당황케하려는 술수를 부린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함께 신라 3최로 불렸던 최승우가 백제 조정에 중신으로 있는지라 효과는 없었다. [[분류:후삼국시대/인물]][[분류:868년 출생]][[분류:944년 사망]][[분류:신라의 유학자]][[분류:경주 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