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귀족)] ||<-2><table 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191919><colbgcolor=#191919><colcolor=#FFF>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남작}}}''']][br]'''{{{+1 최석민}}}[br]崔錫敏'''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崔錫敏.jpg|width=100%]]}}} || || '''이름''' ||<colbgcolor=#fff,#1f2023><(> 최석민 (崔錫敏) || || '''본관''' ||<(> [[경주 최씨]] (慶州) || ||<|2> '''출생''' ||<(> [[1858년]] ([[철종(조선)|철종]] 9) [[8월 6일]] || ||<(>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 || '''사망''' ||<(> [[1915년]] [[12월 20일]] (향년 58세) || || '''직업''' ||<(> [[관료]], [[문신]]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작위''' ||<(> [[조선귀족]] [[남작]] ||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목차] [clearfix] == 개요 == [[구한말]]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 관제 정비와 지방 제도, 세금 분야의 전문가로 [[의정부]]와 내각의 관리로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인물이다. == 일생 == [[1858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한성부]] 북부 이동이다. [[1894년]] [[의정부]] 주사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895년]] [[4월]]에 내각 주사, [[5월]]에는 평양부 참서관이 되었다. [[1899년]], 법부 참서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법부|법부대신]]이었던 [[조병식]]과의 의견 충돌로 관직에서 물러나 3년 동안 휴양했다. [[1904년]] [[3월]]부터 3개월 동안 [[홍원군|홍원군수]]를 지냈고, 9월 경기도 [[시흥군|시흥군수]]로 임명되었다. 1905년 3월 법부 민사국장으로 정3품관에 승진한 뒤 주임 5등관이 되었고, [[7월]] [[내부]] 경무국장, [[12월]] 다시 지방국장이 되었다. [[1906년]] [[4월]] 지방조사위원으로 발령을 받아 [[조선]]의 지방을 조사해 [[지방자치]] 확립에 노력했다. [[5월]], 종2품관으로 승진해 [[내부]]와 [[법부]]의 일을 두루 맡았다. [[1907년]] [[1월]] 봉상사 제조를 거쳐 [[중추원#s-2]] 찬의가 되었고, 5월 [[경기도지사|경기도 관찰사]]를 맡았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제국|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귀족]] 중 남작 작위는 주로 전직 관료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칙임관 1등 이상의 현직에 재직 중인 것을 기준으로 이 작위를 수작했다.] [[1911년]] [[1월]], 일제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1년 8월 29일에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매일신보]]》에 올리기도 했다. [[1915년]] [[12월 20일]] 사망했다. 향년 58세. 그의 남작 작위는 양자 최정원이 습작했다. [각주]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수작, 습작]][[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정치]][[분류:조선/인물]][[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일본의 남작]][[분류:1858년 출생]][[분류:1915년 사망]][[분류:경주 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