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순천시(평안남도) 출신 인물]][[분류:1889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tablealign=right><tablewidth=410><tablebordercolor=#0047a0><tablebgcolor=#fff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최상홍}}}[br]崔相鴻'''}}}}}} || ||<|2><width=80><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9년]] [[10월 14일]] ||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관하리 || ||<|2><color=#fff> '''사망''' ||[[1943년]] [[5월 19일]] || ||[[평안남도 순천군]] || ||<color=#fff> '''직업''' ||[[독립운동가]] ||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최상홍은 1889년 10월 14일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관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음력 11월 [[평양]]에서 [[현기정]] 등이 결성한 비밀결사 공성단(共成團)에 가입하여 단원을 모집했다. 공성단에서는 역원(役員)을 선정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우국금(憂國金)이라는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공성단 명의로 대한독립단 통신부(通信部)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독립신문(獨立新聞)>, <포고문> 등을 국내로 들여와 배포하였다. 또한 최상홍 조카의 처가 사람인 오완종(吳琓鍾)과 김창섭 등은 1919년 12월 '1920년 1월 1일은 폐점(閉店)하고 [[일장기|일본국기]]를 띄우지 말라'는 내용의 문서 100매를, 그리고 1920년 2월 28일에는 조선독립에 관한 문서를 작성하여 [[평양]] 내에 배포하기도 했다. 한편 1919년 [[음력]] 11월 20일경 재무부장을 맡았던 현기정이 유하현으로 출발한 후 일단 백계홍이 그를 대신해 재무부장을 맡아 적당한 지도자를 물색하였다. 1920년 1월 20일경, [[평안남도]] 참사(參事) 안석(安奭)을 단장(團長)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이후 [[서울]]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월 16일경 [[평양]]으로 돌아온 안석이 "장차 실력을 양성하면 자연히 독립의 시기가 올 것이므로, 공성단과 같은 위험한 단체는 해산하고, 경제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공동 출자해 조합을 만들어 객주(客主)를 경영하자"고 제안하였다. 단원들은 이 의견에 찬성하여 각자가 출자해 [[평양]] 관후리에 8,500원 상당의 집 1채를 점포로 구입하기로 했는데, 이때 최상홍은 1,000원을 출자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20년 10월 1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공소하여, 1921년 1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4년을 받고 [[진남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4년 7월 2일 출옥하였다. 이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5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최상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