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천도교 신자]][[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897년 출생]][[분류:192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최동호.png|width=300px]] || || 성명 ||최동호(崔東昊) || || 생몰 ||[[1897년]] [[9월 14일]] ~ [[1923년]] [[5월 21일]] || || [[출생지]] ||[[한성부]] 가희정[br](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희동) || || 사망지 ||[[경성부]]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의 차남이다. == 생애 == 최동호는 1897년 9월 14일 한성부 가희정에서 부친 [[최시형]]과 모친 손소사[* [[손병희]]의 여동생이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 후 부친 최시형이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가 그를 보살펴줬다. 최동호는 17세에 천도교의 간부인 오지영의 장녀 오순엽과 결혼했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고,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15년 이래 형 [[최동희]]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그는 1919년 3월 1일 오전에 어머니, 형수, 그리고 아내와 함께 전날 보성사에서 [[이종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500매를 종로와 용산 일대에 배포하기 위해 맡은 구역으로 갔다. 최동호는 용산 일대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군중이 서울 남대문 조선은행 앞에 모였을 때, 그는 여기에 참가해 독립만세를 함께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20여 일간 [[손병희]]와의 관계,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에 대해 알았는지를 추궁받은 뒤 훈방 조치되었다. 1919년 5월 20일, 그는 형 최동희의 지시를 받고 서울에 들어온 천도교 의사원 [[홍일창]]을 만났다. 5월 24일, 홍일창이 최동호에게 물었다. >"조선 독립에 필요한 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해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최동호가 답했다. >"경성부 수송동에 거주하는 내 장인인 오지영이 천도교의 자금 4∼5천 원을 보관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그 돈을 탈취하자." 그가 굳이 탈취하기로 한 것은 당시 천도교 지도부가 일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순순히 내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동호는 '일본인 형사로 위장해 돈을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며, 과거 정창수에게 받아 보관하고 있던 9연발 권총에 총알 9발을 장전한 채로 동지 최욱에게 건네주었다. 최동호는 '일본 옷을 착용하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일본 헌병대에서 조선인 통역을 해 주고 있는 여보현이 적당하겠다'고 덧붙였다. 최욱이 신의주까지 가서 안동현에 있는 여보현을 부르고, 여보현이 오면 오지영의 돈을 탈취할 계획이었다. 그런 후엔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1919년 5월 26일, 최욱이 경성을 출발해 여보현과 이만형을 신의주에서 데려왔다. 같은 달 28일 아침, 이들은 함께 경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하루 전날인 5월 27일에 이 일이 발각됐다. 최동호는 홍일창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 종로경찰서에 수감됐다. 이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920년 10월 28일 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병고에 시달리다 [[경성부]]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동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