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경주 최씨]][[분류:남해군 출신 인물]][[분류:1908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 성명 ||최금경(崔金莖) || || 이명 ||최봉식(崔鳳植)‧최량(崔良) || || 본관 ||[[경주 최씨]] || || 생몰 ||[[1908년]] [[1월 25일]] ~ [[1957년]] [[4월 7일]] || || [[출생지]]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남해)|삼동면]] 영지리[*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봉기]]·[[최용덕(1920)|최용덕]]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최금경은 1908년 1월 25일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에서 태어났으며, 10대 때 [[경성부]]에서 거주했다. 그는 [[조선 총독부]]에 의해 급비생 신분으로 도쿄 [[와세다대학]]에 유학갔지만, 재학 중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공산주의에 공감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1930년 7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의 5개 순회강연반 가운데 중앙반 연사로서 전국 순회강연을 하였다. 1931년 3월 경성부에 체류하던 그는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과 중국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1931년 7월 서울에서 [[성동고등학교|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中央基督敎靑年會學校) 학생인 김만유(金萬有)·홍병모(洪炳模) 등과 함께 먼저 대중 선동 단계로 '학생제네스트'라는 동맹협의회를 기획하고, 혁명촉진의 방법으로 격문을 배포하여 학생제네스트를 감행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31년 7월 6일 김병선(金炳璇)의 하숙집에서 [[만보산 사건]]이 조선총독부의 실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리는 격문 약 2,000매를 인쇄하였다. 또 7월 8일 홍병모에게 유영경(柳榮京)을 소개해 홍병모를 지도·원조하였다. 그날 밤 10시경부터 [[휘문고등학교|휘문고보]]·여자고보는 이동재(李銅材), [[동덕여자고등학교|동덕여고보]]·청년회학관은 홍병모, 고등예비실업전수는 김만유 등에게 분담해 격문을 배포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영경은 [[경복고등학교|경성 제2공립고등보통학교]]에 격문을 배포하게 하는 등 서울의 각 학교에 배포한 후 동맹휴교를 일으키려다가 체포당했다. 체포된 인원은 총 17명으로 이 중에서 6명만이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최금경은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4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최금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