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서울대학교의 총장)] [[파일:최규동.png]] * 崔奎東 (영천 최씨) * [[아호]]: 백농(白儂) * 1882년[*A 1881년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다.] ~ 1950년 10월 18일[* 사망일 출처: 조선일보 1991년10월2일자 기사 '납북 인사 사망 경위 처음 밝혀져']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교육자, 교육행정가. == 상세 == 1882년[*A]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군/행정#s-7|가천면]] 창천동에서 최영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세 되던 1901년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상경한다. 상경 도중 화성향교의 전신인 차씨 서당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처음 [[아라비아 숫자]]로 덧셈 뺄셈을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또 중교의숙[* 中橋義塾. 1896년 [[민영기(친일반민족행위자)|민영기]]가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종로구 중학동에 설립한 근대교육기관으로 1906년 폐교되었다.]에 들렀다가 서양 산법을 보고 그 과학성과 명료함에 탄복하여 현대 셈법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1905년부터 광성실업학교와 광신상업학교에서 산술을 배웠으며, 이 무렵 안일영[* 중동학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수학교사]과 유일선[* 동경물리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한국인 최초로 근대수학을 전공한 인물로 정리사를 설립해 근대수학을 가르쳤다.]을 만나게 된다. 이후 유일선이 설립한 정리사[* 精理舍. 1906년 서울에 설립되어 1912년까지 운영] 수학연구과를 졸업[* 광성실업학교와 광신상업학교는 중도에 그만 두었다.]했다. 이 무렵 청년학관, [[중앙고등학교|융희학교]], [[중앙고등학교|기호학교]], [[대성학교]], [[휘문의숙]], 기명학교[* 箕明學校. 1905년 평양 성당에서 세운 가톨릭계 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에 부임했다. 당시 최규동은 '최[[대수학|대수]]'로, 안일영은 '안[[기하학|기하]]'로 불리며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수학 강의가 유명했다. 1918년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했다. 1919년 국내 최초로 중등교육 수학 교과서를 집필하여 출간했다. 1920년 6월 [[한규설]], 남궁훈(南宮薰)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여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었으며, 노동독본 등 야학교재의 편찬 간행과 정기강연회를 실시했다. 1934년 5월에 국학 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창립되자 그 찬조위원이 되어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언어학자 대회에 한국대표로 정인섭(鄭寅燮)을 파견하여 한글과 한국어의 과학성을 알리게 했다. 광복 후 [[미군정]] 학무국의 자문 기구인 한국교육위원회, 교육심의회 위원으로 교육행정을 담당하였고 서울시교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조선교육연합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고 정기 간행물 '새교육'을 발간하였다. 1949년 제4대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어 1950년 10월 18일 평양 부군 용성 마림마을에서 공습으로 사망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친일 논란 ==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변단체인 조선교육회 기관지 〈문교의 조선〉에 중동학교장 최규동 명의로 '죽음으로써 군은(君恩)에 보답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징병제/일본|징병제도]] 실시의 감격’이라는 특집기획에 실린 네 편의 글 가운데 하나로[* 다른 세 편의 글을 쓴 사람은 연희전문학교장 [[윤치호]], 한성상업학교장 김주익, 휘문학교장 홍산범식] 설사 강요에 의해서 집필했더라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친일행위임에는 틀림없다.[[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83026.html#csidx8f990bae42494758c53f1e4da57dbcb|관련기사]] 다만 당시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 주었다는 증언이 있고, 서울대 총장 임명시에도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직접 쓰지 않은 것으로 해명이 되어 임용된 사실이 있다. [[http://www.sp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7802|관련기사]] 2015년 3월 교육부는 최규동을 '3월의 스승'으로 선정했다. 이에 대해 상기한 친일 행적을 한 인물이 스승으로 떠받들어질 자격이 있느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당시 심사과정에서 최 선생의 친일행적 여부를 확인했다. 창씨개명 거부, 건국훈장 추서 등 대한민국 초기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됐다”고 해명했다.[[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309500152|#]]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이 논란에 대해 “일부 자료만을 갖고 전 생애를 친일행위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503091713171|#]]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82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국공립대학 총장/장관급]][[분류:영천 최씨]][[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납북자]][[분류:6.25 전쟁/사망자]][[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