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대한민국의 목사, rd1=최광(목사), other2=독립운동가, rd2=최광(독립운동가))] ||<-2><table align=right><table width=400><table bordercolor=#bc0021><bgcolor=#bc0021><tablebgcolor=#ffffff,#1f2024>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B, #BC0021 20%, #BC0021 80%, #9C001B)" {{{#ffffff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br]{{{+1 최광}}}[br]崔光| Choe Kwang'''}}}}}}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409_234_2.jpg]]}}} || ||<bgcolor=#bc0021> {{{#ffffff '''출생지'''}}} ||일본 조선령 함경북도 || ||<bgcolor=#bc0021> {{{#ffffff '''생몰년도'''}}} ||1918년 7월 17일 ~ 1997년 2월 21일(향년 79세)|| ||<bgcolor=#bc0021> {{{#ffffff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width=28]] [[북한]] || ||<bgcolor=#bc0021> {{{#ffffff '''최종계급'''}}} ||[[파일:1920px-Marshal_of_the_KPA_rank_insignia.svg.png|width=28]] [[원수(계급)|인민군원수]]|| ||<bgcolor=#bc0021> {{{#ffffff '''전직'''}}} ||국방위원회의 부위원장 || ||<bgcolor=#bc0021> {{{#ffffff '''정당'''}}} ||[include(틀:조선로동당)]|| [목차] [clearfix] == 개요 == [[북한]]의 [[군인]], 1930년대 만주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과 함께 한 대표적인 심복. 본명은 최명석(崔明錫)이다. == 생애 == [[오진우]], [[리을설]], [[최현(북한)|최현]] 등과 함께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항일 [[빨치산]] 1세대였고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었던 갑산파의 주요 인물로 유명하지만, 다소 부침이 있는 경력을 갖고 있었다.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자료마다 출생지가 [[후창군|후창]]이나 [[라선특별시|라선]] 등으로 다르게 기재되어 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1930년대 후반 무렵에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고, 이 때 김일성과 처음 만나 최측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관동군]]의 항일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1940년에 [[소련]]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의 [[하바롭스크]]로 넘어갔고, 이 곳의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1942년에 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 제88특별저격여단으로 편입되자 해당 [[여단]]의 [[소대장]]에 부임했다. [[만주 작전]]으로 관동군이 만주 지방에서 일소되자 [[대위]]로 진급했고, 동북항일연군 옌벤분견대를 이끌고 옌벤에 진주해 관동군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1946년 봄에 귀환해 김일성의 심복으로 [[조선인민군]]과 북한 정권 창건 작업에 참가해 인민군 제1사단 [[참모장]]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인민군 제13사단의 [[사단장]](계급은 [[준장|소장]])으로 참전했고, 전쟁 후반기인 1952년 가을 [[강건(북한)|강건]]군관학교 교장으로 이임했다. 휴전 후에는 제5군단에서 [[군단장]]을 잠시 맡다가 1954년 1월에 [[소장(계급)|중장]]으로 진급하면서 제1집단군 참모장을 역임했고, 정계에서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출세 행보를 착실히 밟았다. 개전 10주년이었던 1960년에는 [[중장|상장]]으로 재차 진급했고, 당 중앙위원과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부상을 역임했다. 1962년 10월에는 민족보위상으로 이임한 김창봉의 후임으로 총참모장에 부임했고, 동시에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했다. 총참모장 재임 기간 동안에는 김창봉, 허봉학 등과 함께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비롯한 대남/대미 군사도발을 입안하고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푸에블로호 나포에 성공한 직후에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군부와 정계의 실력자로 [[리즈시절]]을 한창 누릴 때였던 1968년 12월 무렵 갑자기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었고, 이듬해 1월에 열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유일사상체계를 혼란시키고 당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김창봉과 함께 공개 비판을 받으며 [[숙청]]되었다. 다만 숙청 후 행방이 완전히 묘연해져버린 김창봉과 달리, [[황해남도]] 은률광산의 광부로 좌천되면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1976년 봄에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으로 부임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복권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했고,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과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면서 공식적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와 수산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1988년 2월에는 [[정치장교|정치위원]] 폐지 문제를 거론했다가 실각한 [[오극렬]]의 후임으로 재차 총참모장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부임했다. 1990년에는 [[김정일]]의 군부 승계 작업 일환으로 신설된 국방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고, 1992년 4월에는 김일성의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아 진행된 군부 최고위층 진급식에서 [[차수(계급)|차수]] 진급과 함께 두 번째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김일성 사망 후에는 국가장례위원회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1995년 10월에는 같은 해 2월 오진우가 죽은 뒤 몇 달 동안 공석이었던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조선인민군 [[원수(계급)|원수]]로 진급해 리을설과 오진우에 이어 세 번째로 인민군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군부 복귀 후에도 계속 개혁파와 갈등이 있었고, 김일성 사후에는 그냥 퇴물 늙은이 취급을 받는 등 말년의 위치는 좀 [[안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건강 상태도 계속 악화되어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빈도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7년 2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장례는 오진우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혔다. 여담이지만, 군사적 능력은 오진우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역시 밑바탕이 부실하고 과거 빨치산 시절의 경험만 중시해 신무기나 전술의 도입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인민군 내 개혁파의 수장이었던 오극렬을 비롯해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의 소장파 장성들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오극렬 실각 후 총참모장이 되면서 오진우와 함께 개혁 세력을 억누르고 군의 보수화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북한군은 이후 [[고난의 행군]] 등을 거치면서 [[막장]]화가 심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류:1918년 출생]][[분류:함경북도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분류:소련의 군인]][[분류:북한의 군인]][[분류:6.25 전쟁/군인]][[분류:조선인민군 총참모장]][[분류:인민무력부장]][[분류: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분류: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분류:북한 내각 부총리]][[분류: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분류:1997년 사망]][[분류:대성산혁명렬사릉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