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채명원}}}'''[br]'''蔡命元'''}}}}}}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채운식(蔡雲植) || || '''자''' ||경언(慶彦) || || '''본관''' ||[[채(성씨)|인천 채씨]][* 27세 식(植) 항렬.] || ||<|2> '''출생''' ||[[1901년]] [[10월 18일]] ||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br](현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공산동|미대동]])[*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채(성씨)|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갑원]]·[[채경식]]·[[채봉식]]·[[채학기]]·[[채희각]]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66년]] [[11월 3일]][* 인천채씨대동보 4권 7쪽에는 9월 20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채명원은 1901년 10월 18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아버지 채덕해(蔡德海)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정국(崔禎國)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5촌 당숙 채향해(蔡享海)에 입양되었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00302010000237|#]] 그해 4월 28일 밤 10시에는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봉식]]·[[채송대]]·[[채학기]]·[[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0&evntId=0034987184&evntdowngbn=Y&indpnId=000002587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검에서 공소가 취하되어[[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43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원심 판결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66년 11월 3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인천 채씨]][[분류:동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01년 출생]][[분류:196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