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table width=550><tablebordercolor=#000000><table align=right>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20070529115221197234112.jpg|width=290]]}}} || ||<-3><#999999> '''{{{+2 채만식}}}[br]{{{+1 蔡萬植}}}''' || ||<-2><#dddddd> '''이름''' ||채만식(蔡萬植) || ||<-2><#dddddd> '''출생''' ||[[1902년]] [[7월 21일]][br][[대한제국]] [[전라북도]] [[군산시|임피군]] 군내면 동상리[br](現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 ||<-2><#dddddd> '''사망''' ||[[1950년]] [[6월 11일]] (향년 47세)[br][[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시|이리시]][br](現 [[전라북도]] [[익산시]] [[익산시/행정#s-2.3|마동]]) || ||<-2><#dddddd> '''본관''' ||[[채(성씨)|평강 채씨]] || ||<-2><#dddddd> '''학력'''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br][[와세다대학]] 문학부(중퇴) || ||<-2><#dddddd> '''직업''' ||[[소설가]], [[극작가]], [[수필|수필가]] || ||<|2><#dddddd> '''가족''' ||<#EAEAEA> '''부모''' ||채규섭(아버지), 조우섭(어머니), 형 4명, 누나 1명 || ||<#EAEAEA> '''배우자''' ||은선흥 || ||<-2><#dddddd> '''종교''' ||[[유교]]([[성리학]]) || ||<-2><#dddddd> '''활동''' ||[[1922년]] ~ [[1950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채만식(蔡萬植, [[1902년]] [[7월 21일]] ~ [[1950년]] [[6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채(성씨)|평강]](平康)이며,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대표작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1934), 《[[탁류]](濁流)》(1937) 《[[태평천하]](太平天下)》(1938)[* 《조광(朝光)》 연재 당시 원제는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치숙]](痴叔)〉(1938), 〈여인전기(女人戰紀)〉(1944), 〈미스터 방(方)〉(1946) 등이 있다. == 생애 == 1902년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6남매 중 5남으로 출생하였다. 서울의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와세다 고등학원은 [[구제고등학교]] 및 대학 예과 과정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써 온 소설로 등단하였고, 곧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동반자 작가[* 당시 유행하던 [[카프]] 계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경향의 소설을 쓴 일련의 작가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 동반자 작가의 대표적인 예로 [[이효석]]이 있다.]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풍자]]적인 성향의 작품을 발표,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텔리와 빈대떡>으로 입지를 굳혔다. 40대 중반에 사망해 작품 활동기 길지 않았음에도 대표적 다작 작가로 유명한데 소설, 희곡,[* 동반자 작가 시절에는 오히려 소설보다 희곡을 많이 썼다.] 동화, 수필, 평론 등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51218935&nidx=18936|작품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채만식은 동시대 작가 위에 도도하게 군림한다.]] 서동산(徐東山)이라는 가명으로 최초의 근대적 장편 [[추리 소설]]인 〈염마(艶魔)>를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김유정과 함께 신식교육을 받은 도시인임에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다룬 작가인데 [[제주도 사투리]] 말고는 다 나온다. 똑같이 사투리 활용이 다채로운 김유정이 요절로 30여편만 남긴데 반해 200여편을 남긴 사람의 작품이 8도 사투리를 넘나들어서 전집 내기 힘든 작가로 유명하다. 예술가답게 잦은 검열 기준을 넘나드는[* [[마르크스]]를 [[막걸리]]라고 돌려쓰는 등, 이런 경향은 〈치숙>에서 잘 드러난다. 후기 소설(시기적으로는 일제 말)로 갈수록 총독부의 탄압 강도와 정비례하는 검열 때문에 '청산가리'와 같은 고유 명사를 '○○칼리' 같은 식으로 복자 처리해서 나오기도 한 듯하다. ] 풍자적 성향의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다가, 그 이후 독서회사건으로 인하여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 친일 행적 == 다른 친일파 문학가처럼 강연과 친일적 소설과 시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별로 튀는 행동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채만식은 광복 이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친일 행위를 한 것이 정당화될 수 없지만, 채만식은 적어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다른 친일 문인들보단~~예를들어 [[김동인]]~~ 양심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광복 이후에는 <미스터 방>이나 <논 이야기>, <[[이상한 선생님]]> 등으로 [[미군정]] 하의 남한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 소설 속에 나오는 [[미 육군]]들의 모습도 그리 좋게 나오지 않는데, 거만한 상급자라는 투로 표현했다. 당시 일본의 역할을 미국이 대신 맡게된 신탁통치 시대상에서는 정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을 '''정확히 2주'''(정확히는 6월 11일 사망) 앞두고 낙향한 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48번째 생일을 한달 앞두고 47세로 사망한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당시 결핵은 돈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치료가 가능했었지만 채만식은 가난해서 그럴 돈조차 없었다. 게다가 창작을 격하게 하여 건강이 상했고 당시 그의 하나뿐인 아들도 [[장티푸스]]에 걸려 자신의 병세 또한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병간호를 하느라 몸을 돌보지 못하였다.] 그가 죽기 두어 달 전에 남긴 말은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지]] 20권만 보내 주소.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본 일이 없네. 이제 임종이 가깝다는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 용지를 수북히 놓아 보고 싶은 걸세."[* 평소 채만식은 결벽증이 심해 글이 자신의 마음에 들때까지 고치는 경우가 많아 원고지 한 장 분량의 초고를 쓸 때에도 10장은 기본으로 버리고 썼다고 하며 작품을 쓸 때에도 원고지 수를 항상 확인해서 담당 기자가 매우 까다로워했다고 한다. 또한 외투와 중절모를 갖춘 정장에 웃는 포즈로만 사진을 찍었고 남의 집에 갈 때에도 항상 자신의 개인 수저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교수 최유찬은 자신의 저서 <문학의 모험>에서 채만식의 친일 행위를 무조건 비판하기만 하는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상술하였듯이 채만식의 경우 인정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돌베개 출판사에서 쓴 친일파 관련 서적에선 [[이효석]]과 같이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인 평을 내리고 있다. == 여담 == 평소 [[육식]]을 즐겨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도[* 왜냐면 채만식은 형의 금광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밥상에는 꼭 [[고기]] 반찬을 올렸다고 한다. 하루는 지인이 채만식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밥상을 보고 이토록 고기를 즐기니 채(菜)만 식(食)이 아니라 '육(肉)만식(食)'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단다. 이런 습관에서 기인했는지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 편이며, 심지어는 [[산적(요리)|먹는 산적]]을 가지고 소설 한 편을 쓰기도 했다. == 채만식 문학상 ==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채만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채만식의 작가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소설가]]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을 제정했다. 매년 10월 5일 군산 시민의 날에 시상식이 열린다. 2003년부터 시상되기 시작했는데, 2005년에는 채만식의 [[친일]] 논란 때문에 한 해 걸렀다. [[https://news.v.daum.net/v/20050831104622359|관련 기사.]] 2006년부터 다시 시상하기 시작해 2018년 15회를 맞았다. 다음은 채만식문학상 역대 수상자 명단. ||||||||||<#E5D85C><:> {{{+1 {{{#FFFFFF '''채만식 문학상 역대 수상자'''}}}}}} |||||||||||| ||<#FFFFB6><:> '''회차''' ||<#FFFFB6><:> '''연도''' ||<#FFFFB6><:> '''작가''' ||<#FFFFB6><:> '''작품명''' || || 1 || 2003 || 정형남 || 내 안의 나를 찾아서 || || 2 || 2004 || 백시종 || 서랍 속의 반란 || || 3 || 2006 || 라대곤 || 망둥어 || || 4 || 2007 || [[손영목]] || 거제도 || || 5 || 2008 || 김상렬 || 그리운 쪽빛 || || 6 || 2009 || 전성태 || 늑대 || || 7 || 2010 || 문순태 || 생오지 뜸부기 || || 8 || 2011 || 김지연 || 명줄 || || 9 || 2012 || 송하춘 || 스핑크스도 모른다 || || 10 || 2013 || 공선옥 ||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 || 11 || 2014 || 이시백 || 나는 꽃도둑이다 || || 12 || 2015 || [[성석제]] || [[투명인간(동음이의어)#s-6|투명인간]] || || 13 || 2016 || 손홍규 || 남자의 가출 || || 14 || 2017 || [[한수산]] || [[군함도(소설)|군함도]] || || 15 || 2018 || 이선구 || 아담의 추억 || == 대표작 == *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나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민족의 죄인]] : 광복 직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과 변명을 소설의 형식으로 써낸 작품이다. 역시 생전에는 단행본이 발간되지 않았다. * 명일 : 궁핍한 개화기 조선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 * 염마 : 추리소설 * [[왕치와 소새와 개미와]] : 채만식이 쓴 대표적 우화. * 인텔리와 빈대떡 : [[소설]]이 아닌 [[희곡]] 작품이다. * 삼대 :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탁류#s-1]] : 193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태평천하]] : 194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소망#s-4]] * [[치숙]] * 순공있는 일요일 * 미스터 방 * 논이야기 * 두 순정 * [[이상한 선생님]]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군산시 출신 인물]][[분류:평강 채씨]][[분류:1902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문화,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