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1 滄海郡}}}[* 滄은 蒼이라고도 쓴다.]. [[기원전 128년]] 가을(음력 7~9월)에 [[전한]] [[무제(전한)|무제]]가 설치하고 [[기원전 126년]] 봄(음력 1~3월)에 폐지한 군현이다. == 연혁 == 예군 [[남려]]가 [[고조선]]을 배신하고 28만 명이나 되는 인구[* 한서 지리지에는 요동군의 인구가 272,539명이라고 제시되어 있는데, 이를 능가하는 인구가 한꺼번에 투항했다기보다는 창해군 설치 예정지에 살던 인구수를 추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고, 이에 팽오(彭吳)가 [[동예|예]](濊)와 [[고조선]]을 조율한 뒤 한이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당시 한나라는 패수(浿水, 지금의 [[청천강]])를 고조선과의 경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만번한(滿番汗, 지금의 [[다롄]]시 좡허(庄河)현급시 일대, [[대양하]] 근교)부터 마자수([[압록강]])를 건너 패수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에는 그곳에 살던 고조선 친화적인 중국계 망명인들로 인하여 한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닿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진(통일왕조)|진]]의 옛 빈 땅[秦故空地]'이라는 구절로 나타났다. 무제는 이곳을 영토화하고 패수까지 진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군현의 운영과 유지를 위한 물자 및 인력 징발로 인해 인접한 연(燕)과 제(齊) 지방[* 이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허베이 성]], [[랴오닝 성]], [[산둥 성]]을 가리키는 지명이다.]이 피폐해져 봉기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무제는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길까지 교통로를 정비할 것[* 한무제가 서남이(西南夷) 정벌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질적으로 군현을 설치하고 운영함에 있어 주변의 물자의 이동이 빈번하였고, 특히 명령이나 행정문서도 이러한 교통로의 정비가 이루어지고나서야 본격적으로 운영될 수 있기에 교통로 정비는 변군 확장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을 명하였지만, 당시 [[어사대부]]였던 공손홍(公孫弘)의 건의로[* [[https://zh.wikisource.org/wiki/%E5%8F%B2%E8%A8%98/%E5%8D%B7112|『사기』 권112 평준후주부열전(平津侯主父列傳) 제52 공손홍(公孫弘) 조]]. 공손홍이 창해군 뿐만아니라 당시 한의 변군확장사업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낸 것인데, 유방은 공손홍의 건의를 듣고 반론을 제기하며 거절을 표했다. 그러나 공손홍이 삭방군을 남기되 창해군과 서남이 개척 사업을 폐기해달라고 청하자 무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무산되고 창해군은 폐지된다. 인력과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고조선의 일부를 영토화하려 했던 무제의 시도는 불과 2년도 안 되어 무산되었다. 그러나 창해군이 폐지됐다고 그 땅을 한이 모조리 상실한 것은 아니고, 압록강 위쪽의 만주 땅에는 무차(武次)현, 서안평(西安平)현, 번한(番汗)현이 살아남아 요동군 동부도위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뒤, 동부도위 [[섭하]]가 고조선의 기습을 받아 살해당하고, 이후 [[왕검성 전투|고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창해군이 있던 자리에는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이 설치된다. 사기 [[장량(전한)|유후]]세가에 나오는 인물 [[창해 역사]]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설이 있다. == 사료에서의 등장 == 다음은 창해군과 관련된 사료들이다. 작성된 순서대로 정렬하였다. >[[팽오]]가 [[동예|예]](濊) 및 [[고조선|조선]](朝鮮)과 장사하자, 창해군을 두었는데, 이에 연(燕)과 제(齊)의 사이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gray (중략)}}} 이때 한(漢)나라는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인부[作者]들이 수만 명이었다. 1,000리에 걸쳐 식량을 운송해야[負擔] 했으므로, 대개 10여 종[* 약 64석]을 보내면 1석만 도착했으니, 공(邛)과 북(僰)들과 거래하여 그것(식량)을 모아야 했다. 수년이 지나도 길은 완성되지 않았는데, 만이(蠻夷)가 이를 노려 수차례 침공하니, 관리들은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무찔러야 했다. 모든 파촉(巴蜀) 지방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하는 데는 부족했으므로, 이에 호민(豪民)들을 모아 남이(南夷)에서 경작하게 하여, 곡식을 지방관[縣官]에게 내게 하고 그 비용은 도내(都內, 중앙)에서 받도록 했다. '''동쪽으로는 창해군에 이르렀는데 인부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남이(南夷)와 비슷했다.''' >彭吳賈滅[* 문맥상 '멸하다'가 나올 자리가 결코 아니며, 보통 예(濊)의 오기로 본다([[https://michigan358.blog.me/220801068451|참고]]).]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gray (중략)}}} 當是時,漢通西南夷道,作者數萬人,千里負擔饋糧,率十餘鐘致一石,散幣於邛僰以集之。數歲道不通,蠻夷因以數攻,吏發兵誅之。悉巴蜀租賦不足以更之,乃募豪民田南夷,入粟縣官,而內受錢於都內。東至滄海之郡,人徒之費擬於南夷。 >{{{#!wiki style="text-align:right" 『[[사기(역사책)|사기]](史記)』 권30 평준서(平準書) 제8([[https://zh.wikisource.org/wiki/%E5%8F%B2%E8%A8%98/%E5%8D%B7030|원문]], [[https://michigan358.blog.me/220801068451|번역]])}}} >원삭 3년(기원전 126년), 장구(張歐)가 면직되니 공손홍(公孫弘)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이때는 서남이(西南夷)와 통교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을 설치했으며, 북쪽으로는 삭방군(朔方郡)을 축성했었다. 공손홍이 수차례 간언하여 쓸모가 없는 땅을 받드는 일로 중국(中國)을 파폐하게 하니 폐지를 청하였다. 이에 [[무제(전한)|천자]]가 주매신(朱買臣) 등을 시켜 삭방군을 세워 얻는 편익을 들어 공손홍을 나무랐는데, (주매신 등은) 열 가지를 들었으나 공손홍은 한 가지도 반박하지 못했다. 공손홍이 즉시 사죄하며 "(제가) 산동(山東)의 비루한 사람이라 그러한 이점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그렇다면) 서남이와 창해는 폐지하고 삭방군에만 전념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임금이 이내 이를 허락했다. >元朔三年,張歐免,以弘為御史大夫。是時通西南夷,東置滄海,北筑朔方之郡。弘數諫,以為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弘置朔方之便。發十策,弘不得一。弘乃謝曰:「山東鄙人,不知其便若是,願罷西南夷、滄海而專奉朔方。」上乃許之。 >{{{#!wiki style="text-align:right" 『[[사기(역사책)|사기]](史記)』 권112 평준후 주부 열전(平津侯主父列傳) 제52, 공손홍([[https://zh.wikisource.org/wiki/%E5%8F%B2%E8%A8%98/%E5%8D%B7112|원문]], [[https://michigan358.blog.me/220801068451|번역]])}}} >원삭 원년(BCE 128) 가을, 동이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이[*원주 [[복건]]이 말하길, "예맥은 진한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이른다."라고 했다. 진작이 말하길, "예(薉, 본문의 글자)는 예(穢)의 옛 글자이다."라고 했다. 안사고가 말하길, "남려는 예의 군주 이름이다."라고 했다.[br]服虔曰: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晉灼曰: 「薉, 古穢字.」 師古曰: 「南閭者, 薉君之名.」] 구 28만인을 이끌고 항복하므로, 창해군으로 삼았다. {{{#gray (중략)}}} 원삭 3년(BCE 126) 봄에 창해군을 없앴다. >(元朔元年)秋, {{{#gray (중략)}}}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為蒼海郡. {{{#gray (중략)}}} 三年春,罷蒼海郡。 >{{{#!wiki style="text-align:right" 『[[한서]](漢書)』 권6 무제기 제6[[https://zh.wikisource.org/wiki/%E6%BC%A2%E6%9B%B8/%E5%8D%B7006|##]]}}} >팽오가 예와 조선을 뚫자 창해군을 두었는데, 이에 연(燕)과 제(齊)의 사이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gray (중략)}}} (흉노를 치고 삭방을 쌓던) 때에 또한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인부[作者]들이 수만 명이었다. (이하 해석 상동)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gray (중략)}}} 時又通西南夷道,作者數萬人,千里負擔餽饟,率十餘鍾致一石,散幣於邛僰以輯之。數歲而道不通,蠻夷因以數攻吏,吏發兵誅之。悉巴蜀租賦不足以更之,乃募豪民田南夷,入粟縣官,而內受錢於都內。東置滄海郡,人徒之費疑於南夷。 >{{{#!wiki style="text-align:right" 『한서』 권24 식화지(食貨志) 제4[[https://zh.wikisource.org/wiki/%E6%BC%A2%E6%9B%B8/%E5%8D%B7024%E4%B8%8B|##]]}}}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元朔元年,,武帝年也.,,, 濊君南閭等,,【集解】 惠棟曰, 顏籀云, 南閭者, 薉君之名.,,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wiki style="text-align:right"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東夷)열전 제75, 예(濊)[[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03r_0010_0060_0020|##]]}}} == 둘러보기 == [include(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분류:한나라의 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