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창덕궁)] ---- ||<table width=650>[[파일:금호문.png|width=100%]]|| || 금호문 || [목차] [clearfix] == 소개 == {{{+1 昌德宮 金虎門}}} [[창덕궁]]의 궁문이다. [[창덕궁 돈화문|돈화문]]의 서북쪽에 있으며 [[창덕궁 금천교|금천교]]와 마주본다. 정문인 [[창덕궁 돈화문|돈화문]]을 주로 왕의 행차 같은 큰 의례에 이용하였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궐내각사[* 궁궐 내의 행정관청.]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다.[* 위치도 궐내각사와 가깝다.] 조선 후기에 각 문마다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행적으로 고정하였는데, 이 때 금호문은 [[조정]]의 관리인 조신(朝臣)들이 이용하는 문으로 기능하였다. 1789년(정조 13년)에 [[정조(조선)|정조]]가 그러지말고 각자 다니고 싶은 문으로 다니라고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금호문(金虎門)|#]] 현재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입장은 할 수 없고[* [[창덕궁 돈화문|돈화문]]으로만 입장이 가능하다.] 나가는 것만 가능하다. == 이름 == 이름은 [[당나라]]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금호문(金虎門)|#]]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한다. ‘호(虎)’는 [[호랑이]]로, 역시 서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다. 즉 서쪽 문이라는 뜻이다. == 역사 == [[태종(조선)|태종]] 때 [[창덕궁]]을 창건하면서 같이 지은 듯 하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지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8023_007|#]] 1645년(인조 23년)에는 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금호문으로 드나들자 근처에 있는 서연청에서 세자가 조용히 공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폐쇄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10022_002|#]] 그리고 3년 뒤 다시 열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10017_002|#]] 이후에도 여러 번 폐쇄와 개방이 반복되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금호문(金虎門)|#]] == 구조 == * 정면 1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고 용마루 위에 용두를 올렸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초익공으로 익공의 끝을 둥글게 처리한 몰익공 형식이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에 달았다.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위아래|위위아래]]--를 초록색 [[나무]] [[판]]으로 마감하였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하였고, [[문]] 위에는 홍살을 두었다. [[단청]]은 긋기단청[* 가칠단청 위에 [[선]]만 그어 마무리한 단청이다. 가칠단청은 무늬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이다.]으로 입혔다. *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며, 궁 바깥 쪽 방향의 홍살에 걸려있다. == 여담 == *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들이 [[창덕궁]]으로 들어갈 때 이용하였던 문이다. 금호문의 [[수문장]] 박효립이 문을 열고 반정군을 들여보냈다.[[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489779|#]][[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금호문(金虎門)|#]] * 1926년 4월 28일에 [[송학선]]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틀:역대 조선 총독|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의거의 현장이다. 거사 이틀 전에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가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그리고 창덕궁 내 빈소로 가는 출입문을 금호문으로 정하였다. 송학선 의사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문상을 하러 금호문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 마코토|사이토]]가 지날 때를 노려 암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4월 28일에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올 때 뛰어들어 안에 타고 있던 [[일본인]] 2명을 죽이고 달아났다. 그러나 송학선 의사가 죽인 인물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이었다.[* 죽은 일본인은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경성부회 평의원 사토(佐藤虎次郎)였다. 함께 탑승했던 평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郎)도 칼에 맞았으나 중상에 그쳤다.] 결국 송학선 의사는 체포당한 뒤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현재 창덕궁 앞에 ‘송학선의사 의거터’란 표지석이 있지만 금호문이 아닌 [[창덕궁 돈화문|돈화문]] 근처에 세워져있다. ||<table width=650>[[파일: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지석.png|width=100%]]|| || 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지석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송학선, version=9, title2=창덕궁, version2=525)]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