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대군]][[분류:1500년 출생]][[분류:1506년 사망]]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3><tablealign=right><table 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94153E> {{{#gold '''조선 연산군의 왕자'''[br]{{{+1 '''창녕대군[br] 昌寧大君'''}}}}}} || ||<-2><width=30%><#94153E> '''[[군호|{{{#gold 군호}}}]]''' ||<(> 창녕대군(昌寧大君)[* 군호는 [[경상도]] [[창녕군]](昌寧郡)에서 유래했다.] || ||||<:><#94153E>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94153E> '''[[이름|{{{#gold 이름}}}]]''' ||<(> 인수(麟壽) → 성(誠) || ||||<:><#94153E> '''{{{#gold 부왕}}}''' ||<(> [[연산군|조선 연산군]] || ||||<:><#94153E> '''{{{#gold 생모}}}''' ||<(> [[폐비 신씨|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 || ||<|2><:><#94153E> '''{{{#gold 생몰[br]기간}}}''' ||<:><#94153E> '''[[음력|{{{#gold 음력}}}]]''' ||[[1500년]] [[5월 22일]] ~ [[1506년]] [[9월 24일]] || ||<:><#94153E> '''[[태양력|{{{#gold 양력}}}]]''' ||[[1500년]] [[6월 18일]] ~ [[1506년]] [[10월 10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왕족.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부인 신씨]]의 차남이다. == 생애 ==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는지, [[궁]] 밖으로 피접을 많이 다녔다. 좌참찬 윤효손[[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2022_003|#]], [[승지]] 김감과[[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3020_002|#]] [[임사홍]]의 집에서 머물렀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8001_004|#]] 그 중 승지 김감에겐 특별하게 수양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3020_002|#]]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연산군]]이 쫓겨나자 [[충청도]] [[제천시|제천]]으로 [[귀양]]을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05_005|#]] 아버지가 [[왕]]이었던 것을 부정당했기 때문에 창녕대군의 [[군호]] 역시 폐작되었다. [[중종(조선)|중종]]은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연산군]] 자녀들의 처리를 매듭 지으려 했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이 폐주(연산군)의 아들들을 놔두면 위험하다면서 죽일 것을 계속 청했다. 중종은 가슴이 아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공신들의 강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조카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1506년 10월 10일에[* 음력 9월 24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24_003|#]] 향년 만 6세.[* [[세는나이]] 7세.] 같은 날 친형 [[폐세자 이황]]과 이복형 [[양평군(조선)|양평군 이인]], 이복동생 이돈수도 각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폐세자 이황, version=50)] == 사망 이후 == [[중종(조선)|중종]]은 죽은 조카들을 안타까이 여겨 [[장례]]라도 후하게 지내주려 했다.[* 사실 도리상 이게 맞긴 하다. 죽을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죽인다면 적어도 [[장례]] 쯤은 후하게 치러주는 게 예의다. 실제로 진짜 '''죽을 짓 한''' [[폐비 윤씨]], '''좀 꺼림찍하지만 진짜 죄를 지은''' [[장희빈]]도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도왔고 이후 왕비에 준한 제사를 치루게 했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은 이미 죽은 [[서인]]에게 후한 대우는 필요 없으니 관곽이나 내려주라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25_002|#]] 이 때 죽은 [[연산군]]의 자녀들이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인 걸 감안하면 공신들이 어지간히 불안해했고 또 그 만큼 자신들의 반정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후 [[인조반정]] 때에는 [[폐세자 이지]]의 나이가 이황보다 더 많았고 [[광해군]]은 [[연산군]]에 비해 쫓겨날 명분이 부족했는데도 인조와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이지를 죽이지 않았다. 단 나중에는 죽이는데, 그마저도 이지가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걸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연산군]]은 쫓겨날 명분이 충분했고[* 연산군을 쫓아낸 게 잘못이라며 일어난 사건은 없었다. 반면 광해군은 쫓겨난 이후 역모사건에 계속 연루된다.] 그 자식들까지 모조리 사사시킨 걸 보면[* 실제로 어린이와 노약자는 역모에 연루되어도 노비로 만들거나 용서해주는 선에서 그쳤다. 정말 예외가 있었다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아들이 곤장 맞다 죽었고 봉산옥사 때 어린이들까지 끌려와 국문받은 게 거의 전부다.] [[중종반정]] 핵심부들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사실 핵심부들은 모두 다 연산군 밑에서 한자리 했었던 사람들이다. [[유자광]]부터가 [[무오사화]]의 주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이황은 한 때 세자였기에 위험하다고 해도, 창녕대군까지 죽인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나중에 중종은 [[박원종]]에게 어느 정도 야속감이 있었는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하나뿐인 아들(서자)인 박운이 분경[* 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청탁을 하는 일.]을 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김안로 측에 고변이 들어와 그를 변방으로 유배보냈는데 [[정광필]]이 "공신의 하나뿐인 자식인데 선처해주죠"라고 하니 싸늘하게 말하기를 "공신의 자손이라고 봐주면 분경을 하는 자가 또 나타나지 않겠느냐" 하며 거절했다. 실제로 [[중종(조선)|중종]]은 신하들에게 냉혹했지만 자신의 친족과 혈육에게 자상한 군주였다. 하기사 자신의 형인 [[연산군]]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고 신하들에게 옹립된 왕이니 [[인조]]와 궤를 달리 할 수밖에.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폐세자 이황, version=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