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창경궁)] ---- [include(틀:조선 왕궁의 동궁)] ---- ||<table width=662> [[파일:저승전 터로 추정되는 곳.png|width=100%]] || || 저승전 터로 추정되는 곳 || [목차] [clearfix] == 소개 == {{{+1 昌德宮 儲承殿}}} [[창경궁]]의 [[동궁]]으로, [[왕세자]]의 [[집|처소]]였다. 현대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한 [[위치]] 역시 모른다. 다만 기록을 통하여 유추할 수는 있다. 《궁궐지(宮闕志)》[* [[조선시대]] [[궁궐]]의 [[위치]] · [[이름]] · [[연혁]] 등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책]].]에는 ‘[[창덕궁 건양문|건양문]] 밖에 있는 옛 구현전(求賢殿), 광연정(廣延亭)의 터에 위치했다.’고 적혀있다. 건양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문]]으로, 원래 창덕궁의 동쪽 문이었다가 창경궁이 생기면서 두 궁을 잇는 문이 되었다. 그러니까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다. 또한 시민당의 북쪽에 있었다하는데, 《[[동궐도]]》를 보면 시민당의 위치는 현재 [[창덕궁 낙선재|낙선재]] 권역의 동남쪽이다. [[창덕궁 낙선재|낙선재]] 영역은 지금은 [[창덕궁]]이지만, 원래는 [[창경궁]]이었다. 이를 종합했을 때, 저승전은 [[창덕궁 낙선재|낙선재]] 일곽의 일부 언저리에 자리했던 듯 하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창덕궁]]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 이름 == 건물 이름이 '''[[저승]]'''이라(...)[* 참고로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저승]]은 원래 [[고유어]]와 [[한자어]]의 조합으로 지금은 고유어로 분류되어있다. 정확히는 저(이, 그, 저 등의 지칭) + 생(生) = 저생이었는데 발음 변화로 저승이 된 것.] 이름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뜻으로 이름지은 건 아니고(...) [[태자|세자]]를 상징하는 글자인 '儲'(버금 저)[* '임금에 버금가는 존재 = 세자'라는 뜻이다. '쌓다'라는 뜻도 있다.]에 계승한다는 뜻의 '承(이을 승)'을 넣어 지었다. 즉, '다음 왕위를 이을(承) 세자(儲)의 집'이라는 뜻이다. == 역사 == [[창덕궁]]을 창건한 것은 1405년([[태종(조선)|태종]] 5년)이지만, 처음부터 [[동궁]](세자궁)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조선)|성종]] 시기 [[원자]] [[연산군|이융]]을 [[태자|세자]]로 책봉하여 창덕궁에 세자가 머물 공간이 필요하자[* 당시 [[성종(조선)|성종]]은 [[창덕궁]]에 거주했다.], 1485년([[성종(조선)|성종]] 16년) 1월에 창덕궁의 동문 인 건양문 밖에 [[동궁]]을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파|추위]]가 너무 심해 [[공사]] 시작을 미룬 끝에 1487년(성종 18년) 7월에야 완공하였다. 이 때 동궁의 처소로 건립한 것이 저승전이다. 마침 시기적으로 [[창경궁]]을 창건한 지 얼마 안지났을 때이므로, 대부분의 [[재료|자재]]는 창경궁 [[공사]] 후 남은 것들을 활용하였다. 창덕궁에 딸린 동궁으로 세웠으나, 위치때문에[* 위에 언급했듯, [[창덕궁]] 건양문 밖에 지었는데, [[창경궁]]이 생기면서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 된다.] 창경궁 영역으로 들어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404015_002|#]]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화재|불탄 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하였고 한 때 [[인목왕후|소성대비(인목왕후)]]가 머물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3019_003|#]] 이후 [[인조반정]]으로 다시 불탔다. 1647년([[인조]] 25년) 8월에 당시 [[효종(조선)|세자]][* 여기서 말하는 [[세자]]는 [[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었던 훗날의 [[효종(조선)|효종]]이다. 소현세자는 1년 전에 [[죽음|사망]].]가 머물던 임시 처소에 [[저주|흉물]]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창경궁]]을 재건하던 터라 [[동궁]]을 제대로 다시 지었는데, 이 때 [[인경궁]]의 [[동궁]]인 승화전(承華殿)을 옮겨다 세웠다.[* 이 무렵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할 때 다른 [[건물]]들도 저승전과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건물들을 대거 옮겨 지었다. 대표적으로 [[창덕궁 경훈각|경훈각(景薰閣)]]이 된 [[정전#s-6]] 홍정전(弘政殿)과 [[창덕궁 선정전|선정전(宣政殿)]]이 된 [[편전]] 광정전(光政殿), 그리고 [[창경궁 통명전|창경궁 통명전(通明殿)]]이 된, 침전 중 하나인 청와전(靑瓦殿) 등이 있다.] [[공사]]는 9월에 시작했으나 [[한파|추위]] 때문에 잠시 멈췄다가 다음 해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공했다. [[공사]] 중에 실제로 흉물들을 발견했는데 이걸 [[민회빈 강씨|강빈]]의 옥사와 관련한 [[증거|증거물]]로 [[조작]]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3025_003|#]][* 당시 [[민회빈 강씨|강빈]]은 ‘역강(逆姜, 역적 강씨)’이란 멸칭으로 불렸다.] 이후 [[숙종(조선)|숙종]] 초부터는 [[왕세자]]의 부재 시 [[임금]]이나 [[왕비]], [[대비]]가 아프거나 재변이 일어날 때[[http://sillok.history.go.kr/id/ksa_10907025_002|#]] 간간히 머무르는 용도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동궁]]은 [[궁궐]]의 핵심부와는 따로 떨어져서 조용히 머물기 좋았고, 규모도 나름 있어서 생활하는데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몸]]이 안좋아지자 저승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 곳의 서쪽 별당에서 [[죽음|승하]]하였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sa_10912005_001|#]], [[인경왕후]]도 아플 때 잠시 여기서 머물렀다.[[http://sjw.history.go.kr/id/SJW-D06100190-00800|#]][* 이들이 머물던 때는 [[숙종(조선)|숙종]]의 [[태자|세자]]인 [[경종(조선)|경종]]이 태어나기 훨씬 전이다.] 이후 [[경종(조선)|경종]]이 이 곳에서 세자 시절을 보냈고, [[영조]] 연간엔 경종의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경순대비(선의왕후)]]가 머물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ua_10210016_001|#]] 후에 [[사도세자]]가 거처했다. 1746년([[영조]] 24년)엔 [[복도|월랑]]이[[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3002_001|#]], 1764년(영조 40년)에는 [[건물]] 전체가 [[화재|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신하]]들이 다시 지을 것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4012018_001|#]] 이후 재건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 재건하지 않은 이유 === 영조는 '조종의 검소하신 덕을 본받아야한다'며 저승전 재건 공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조]] 재위기간에 저승전에 머물던 [[사람]]은 [[선의왕후 어씨|경순대비(선의왕후)]]와 [[사도세자]]이다. 그런데 선의왕후는 [[영조]]의 가장 강력한 [[정적]] 중 한 명이었으며[* 영조의 [[왕위]] [[계승]]을 극렬하게 반대했고, [[효장세자]]가 요절했을 때는 [[독살]]의 배후로 지목받을 정도였다.], [[사도세자]]는... [[임오화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영조 입장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걸쳐 가장 껄끄러운 두 사람이 살았던 저승전을 다시 짓는 게 아마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 구조 == * 1647년([[인조]] 25년)에 새로 지을 때 제작 된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 따르면, 총 28칸이며 [[온돌|온돌방]]이 동, 서에 각각 6칸 씩 있고 [[대청]]이 16칸이었다. 그리고 익각[*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이 [[동]], [[서]], [[북|북쪽]]에 각각 1칸 씩 딸려 있었다. [[복도|월랑]]은 동쪽에 9칸이었으며 남쪽에도 있었으나 정확한 칸 수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동행각은 2칸, 남행각이 1칸이었다. 이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남아있지 않다. [[그림]]도 없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동궐도]]》는 [[영조]]의 증손자 [[순조]]가 재위하던 기간에 그렸다.] == 여담 == *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선의왕후 어씨|선의왕후]]의 안 좋은 [[기|기운]]이 서린)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 하였다.[* 취선당은 [[희빈 장씨]]의 [[집|처소]]였던 곳이며 [[사도세자]]가 저승전에 머물 당시 [[주방]]으로 개조되었다.] ==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드라마)|붉은 달]]》에서는 [[극]]의 중심 [[공간]]으로 나온다. [[영조]]([[김명곤]] 분)가 [[경종(조선)|경종]] [[독살]]의 주장하던 [[역적]]들에게 습격당한 후,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쇼윈도|보여주기 위한 차원]]에서 경종이 [[세자]] 시절 살았던 저승전에 [[사도세자]]([[김대명]] 분)를 살게 한다. 그런데 첫 날부터 [[장희빈]]([[조미령]] 분) [[귀신]]을 보며, 점점 정신이 혼란해지면서 미쳐간다. 아마 이 설정[* [[사도세자]]의 [[정신 질환]]과 저승전을 연관지은 것.]은 위에 언급한 [[혜경궁 홍씨]]가 남긴 기록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이 [[드라마]]는 [[노론 음모론]]을 전면 부정하고, [[임오화변]]의 원인이 [[사도세자]]의 [[정신 질환]] 및 [[광기]]에 있다고 묘사한[* [[사실]], 이게 [[정사]]에 가깝다.] 거의 유일한 드라마이다.[* [[영화]] 중에선 《[[사도(영화)|사도]]》가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자선당, version=30, title2=선의왕후, version2=80, paragraph2=2.5, title3=붉은 달(드라마), version3=62)] [[분류:창경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