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창경궁)] ---- [include(틀:조선 왕궁의 대비전)] ---- ||<table width=662>[[파일:동궐도 자경전.png|width=100%]]|| || 《[[동궐도]]》 자경전 || [목차] == 소개 == {{{+1 昌慶宮 慈慶殿}}} [[창경궁]]의 대비전이다. ‘자경(慈慶)’ 뜻은 ‘자친(慈親), 즉 [[태후|(왕의) 어머니]]가 복(慶)을 누린다’이다.[[https://bluewaves.tistory.com/4907|#]] 훗날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태후|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처소로 지은 [[경복궁 자경전]]도 여기서 이름을 땄다. == 역사 == 1777년([[정조(조선)|정조]] 1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다. 위치는 [[창경궁 양화당|양화당]] 북쪽의 [[언덕]]이었다. 왜 높은 곳에 지었는 지는 모르나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는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려던 것이고, 둘째, [[창덕궁]]과 가까우면서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에 지었다는 것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지대의 높이 차이가 꽤 나서[* [[창덕궁]]이 높고 [[창경궁]]이 낮다.] 창덕궁에 살던 정조가 원래 혜경궁이 머물던 [[창경궁 경춘전]]으로 일일이 문안가려면 꽤 높은 계단을 이용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https://m.blog.naver.com/moa2004/220476307721|#]] 첫 이름은 자경당(慈慶堂)이었다. 공식적으로 [[혜경궁 홍씨]]는 [[임금]]의 [[숙모]]이자[* [[임오화변]] 이후 [[영조]]가 [[정조(조선)|정조]]를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정조의 법적 어머니는 [[효순왕후|현빈 조씨]](효순왕후로 추증)였다.], 왕이 되지 못한 전(前) [[세자]]의 [[빈]]일 뿐이라 ‘전(殿)’[* 건물의 이름도 위계가 있었다. 제일 높은 것이 ‘전(殿)’이었다. [[임금]]과, [[왕비]], [[태상황|상왕]]과 [[태후|대비]]만 쓸 수 있었다. [[태자|세자]]도 원칙적으로는 못쓰는데 [[경희궁 승휘전]], [[창경궁 저승전]] 같이 아주 용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조선)|정조]]는 혜경궁을 자신의 [[어머니|생모]]로서 극진히 대접했기에 사람들도 처소의 이름을 자경전으로 불렀고 1778년(정조 2년)부터는 [[조선왕조실록|공식적]]으로도 자경전으로 언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202009_002|#]][[https://m.blog.naver.com/moa2004/220476307721|#]] [[창경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위치도 그렇고, 규모도 그렇고, 무엇보다 [[혜경궁 홍씨|사는 사람이 사람]]이니만큼 [[건물]]의 위상은 굉장히 높았다. 혜경궁의 [[손자]] [[순조]]가 훗날 지은 《자경전기》에 따르면 창경궁에서 위상이 [[법전]], 즉 궁궐에서 제일 중요한 전각과 같다고 했다. 1780년([[정조(조선)|정조]] 4년)에는 화빈 윤씨의 가례를 여기서 올렸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403012_001|#]] [[혜경궁 홍씨|혜경궁]]은 이곳에서 계속 살다가 [[순조]]가 즉위한 후인 1802년(순조 2년)에 [[창경궁 경춘전|경춘전]]으로 옮기고 14년을 더 살다가 1816년(순조 16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혜경궁이 나온 뒤엔 [[효의왕후|왕대비 김씨]](효의왕후)가 살았고 1821년(순조 21년) 여기서 [[죽음|승하]]했다. 1827년부터 1830년까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하던 시기에는 이 곳에서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순조]] [[순원왕후|부부]]의 [[생일]]을 축하하며, 즉위를 기념하는 잔치를 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2709009_001|#]][[http://sillok.history.go.kr/id/kwa_12802012_001|#]][[http://sillok.history.go.kr/id/kwa_12902012_001|#]] 이 때 연회공간으로 사용하면서 건물을 증축했다.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헐어서 자미당[* 위치는 [[경복궁 교태전]]과 [[경복궁 자경전]] 사이이다.]으로 지었다. 이후 다시 짓지 않았다. ||<table width=662>[[파일:external/architecture.kunsan.ac.kr/1139290545.jpg|width=100%]] || |||| 제실박물관 시절의 모습 || || [[파일:external/weekly.donga.com/201107250500027_1.jpg|width=100%]] || || 장서각 시절의 모습 || 1909년([[융희]] 3년)에 자경전 터 옆에 제실박물관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가]] [[박물관]]으로 바꾸었으며 박물관을 [[덕수궁]]으로 옮긴 1937년부터 [[장서각]][* 왕실 문서 자료관.]으로 활용했다. [[8.15 광복|해방]] 이후 1981년에 장서각의 보관 [[문서]] 전부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긴 후 빈 [[건물]]로 방치했다가 1992년 11월에 철거했다. 현재는 빈 터이며 자경전 터라는 표지판만 있다. ||<table width=662>[[파일:창경궁 자경전 터.png|width=100%]]|| || 자경전 터 || == 구조 == '''※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옛 [[기록]]이나 [[그림]]들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 1827년에 제작한 《진작정계의궤》와 1829년에 제작한 《기축진찬의궤》에서 묘사한 모습이 다르다. 위에 언급했듯, [[잔치|연회]][[공간]]으로 쓰면서 증축했기 때문이다. || [[파일:1827년 자경전도.png|width=100%]] || [[파일:1829년 자경전도.png|width=100%]] || || 《진작정계의궤》의 《자경전도》 || 《기축진찬의궤》의 《자경전도》 || * 창건 당시부터 1827년까지 [[자경전]]의 모습을 보면, 정면 5칸으로 동, 서, 남쪽에 행각을 두고 자경전 본채와 연결시켜 ‘ㅁ’자 형태를 띄게 했다. 소맷돌이 없는 3개의 [[계단]]을 중앙에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1827년에서 1829년 사이에 증축한 모습은 《[[동궐도]]》에서 볼 수 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나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더 넓어졌다. 중앙의 3칸을 [[대청]]으로 두고 앞, 뒤로 [[마루|툇간]]을 두었으며 대청 양 옆의 [[방]]을 [[온돌]]로 두었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2칸의 방을 덧대었으며 동쪽 칸의 외부는 [[마루|가퇴]]를 두고 [[나무]] [[기둥]]으로 받쳤는데 가퇴의 외면에는 [[창]]이나 [[벽]]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 전면에 월대를 두어 위엄을 돋보임과 동시에 여러 행사를 하기 편하게 했다. [[계단]]도 전과 같은데 새 건물의 경우, 정면의 서남쪽에도 계단이 보인다. 각도 상 보이지 않으나 정황 상 동남쪽에도 계단이 있었던 듯 하다. 이 외에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저 정도도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분류:창경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