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창경궁)]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97200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창경궁 명정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전 정문)] ||<-5><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bg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201~4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width=30%> 384호 ||<|2> ← ||<width=30%> '''385호''' ||<|2> → ||<width=30%> 386호 || || [[창경궁 홍화문]] ||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 [[창경궁 옥천교]] || ---- }}} ||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315288><tablebordercolor=#315288><bgcolor=#fff>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385호}}}]]''' || ||<-2> {{{#fff {{{+1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br]{{{-1 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경궁 명정문, 너비=100%, 높이=100%)]}}}|| ||<width=80> '''{{{#fff 소재지}}}''' ||<bgcolor=#fff>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 || '''{{{#fff 분류}}}''' ||<bgcolor=#fff>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 '''{{{#fff 수량}}}''' ||<bgcolor=#fff> 1동 || || '''{{{#fff 지정연도}}}''' ||<bgcolor=#fff> 1963년 1월 21일 || || '''{{{#fff 제작시기}}}''' ||<bgcolor=#fff> [[조선시대]], 1483년 창건, 1616년 중건 || || [[파일:창경궁 명정문.png|width=100%]] || || 명정문 || [목차] == 개요 == {{{+1 昌慶宮 明政門}}} [[창경궁]]의 [[정전#s-6]]인 [[창경궁 명정전|명정전]]의 [[정문]]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창경궁 홍화문|홍화문]]으로 들어와 [[창경궁 옥천교|옥천교]]를 건너면 바로 보인다.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서 [[경복궁 근정문|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있는 [[경복궁]]과 비슷하지만, 경복궁엔 [[경복궁 흥례문|중문]]이 있고, 창경궁엔 없는 것이 다르다. 경복궁은 [[예|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된 [[정궁]]인 반면, 창경궁은 애초 [[대비]][[궁]]의 개념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당연히 ‘명정전의 문’이란 뜻이며 ‘명정(明政)’란 명칭 자체는 ‘정사(政)를 밝힌다(明)’는 뜻이다.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 [[서거정]]이 지었다.[* 정확히는 [[창경궁 명정전|명정전]]의 [[이름]]을.] == 역사 == 1483년([[성종(조선)|성종]] 14년) 처음 지어졌다. 다른 [[궁궐]]의 [[정전]] [[정문]]과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동향하고 있으며, 이는 [[풍수지리]] 및 [[땅|지형]] [[문제]]에 근거해 배치한 것이다.[* 이는 [[창경궁]] 전체 축이 그렇다.] 이후 중앙의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를 하는 조참과 [[죄인]]들을 심문하는 국청, 외부인 접견과 [[과거제도|과거]] [[시험|시험장]] 등 많은 [[국가]]의 대소사가 열렸다.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불탄 뒤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되었고, 몇 차례 [[수리]]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있다. 즉, 명정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전의 정문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따라서 [[창경궁 홍화문|홍화문]], [[창경궁 명정전|명정전]]과 같이 [[17세기]] 초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파일:1902년 창경궁 명정문.jpg|width=100%]] || [[파일:창경원 명정문.png|width=100%]]|| ||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명정문 || [[창경원]] 시절 명정문 || 다만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놀이공원]] [[창경원]]이 되면서 남쪽과 북쪽의 행각이 철거되었다가 1986년에 [[복원]]되었다. == 구조 ==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며 [[처마|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 [[암석|장대석]]으로 쌓은 4단의 [[기단]]에 7단의 [[계단]]이 [[건물]] 전면에 설치되었다. 그 위에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도형)|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물|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과 평방[*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하였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 [[양식]]으로 하였고 모든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2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 훨씬 높게 세웠다. 다른 [[궁궐]]과는 달리 협칸과 어칸의 너비 차이가 거의 없으나 어칸이 30cm 정도 더 길다. *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고 합각머리 밑의 엮음을 쪽천장으로 가렸으며, 쪽천장의 얽음은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으로 하였고, 문짝은 [[나무]] [[판]]으로 되어있으며 중앙 열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table width=600>[[파일:창경궁 명정문과 명정전의 축.png|width=100%]] || ||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의 축 || * [[창경궁]]의 [[정문]] [[창경궁 홍화문|홍화문]]과 [[정전]] [[창경궁 명정전|명정전]]과 명목상으로는 일직선상에 있으나 실제로는 약간 [[축]]이 맞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설이 있으나 [[풍수지리]]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 여담 == * 12대 [[임금]] [[인종(조선)|인종]]이 유일하게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장례기간]]에 즉위식이 이뤄지는 것이라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슬픈 분위기에서 했기 때문이다.[[https://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06|#]] 단, [[정궁]]도 이궁도 아니기 때문에 인종 이전과 이후에는 [[대관식|즉위식]]이 열리지 않았다.[* 사실 [[인종(조선)|인종]]도 선왕인 [[중종(조선)|중종]]이 [[창경궁]]에서 [[죽음|승하]]했기에 여기서 즉위한 것이다.] * 1755년([[영조]] 31년) 4월에 영조가 당상관에게 뜬금없이 “오늘 당장 [[시골]] [[사람]]인데 [[서울]]에 머물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궁궐]]로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당상관이 급히 나가 서울에 머물고 있는 시골 사람 60명을 명정문으로 데리고 갔다. 시골 [[백성]]들을 만난 영조는 시골의 [[날씨]] 및 [[농사]] 현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백성들에게 이르는 말을 남기고 딱한 사정에 [[눈물]] 흘렸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204017_002|#]] --[[사도세자|난 백성들에게 따뜻한 왕... 하지만 내 자식에겐 차갑겠지...]]--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경궁 명정전, version=19)] [[분류:창경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