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군위군 출신 인물]][[분류:여양 진씨]][[분류:1860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 || 성명 ||진옥련(陳玉鍊) || || 본관 ||[[여양 진씨]] || || 생몰 ||[[1860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9&evntId=0034987763&evntdowngbn=Y&indpnId=000001904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판결문]]에는 1850년 9월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의 기록을 따른다.] ~ [[1944년]] [[11월 10일]] || || [[출생지]]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br](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여양 진씨]] 집성촌이다.[[http://efw.nfm.go.kr/service/book/text/107|#]] 독립유공자 [[홍묵]]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추서 ||대통령표창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진옥련은 1860년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생으로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었다. 1919년 스승인 곽종석이 파리장서 의거로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자, 그해 4월 26일 스승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http://www.blog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341|#]] 당일 오전 10시경 마을 남쪽 입구 도로에서 친구 아들로 구장(區長)을 지낸 홍연구(洪淵九)가 인사를 하며 어디에 가시냐고 묻자, 진옥련은 홍연구에게 [[3.1 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스승 곽종석의 동정을 살피러 간다고 말하면서, "너는 친구의 아들이기에 믿음이 가는데, 이 지방의 독립운동은 어떠한가? 너도 이 마을에서는 원래 구장을 한 일이 있는 손꼽힐 만한 사람이니, 속히 마을 주민들을 규합해 시기를 골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운동을 하여 함께 그 목적을 달성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홍연구는 "자신은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파악한 일본 경찰은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을 빌미삼아 진옥련을 체포했으며, 그는 1919년 7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아[[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9&evntId=0034987763&evntdowngbn=Y&indpnId=000001904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항소하여 그해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그대로 언도받고[[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77&evntId=0034983715&evntdowngbn=Y&indpnId=000001527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11월 10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