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조선 시대에 벌어진 사건, rd1=진산 사건)] {{{+1 珍山波動}}} [목차] == 개요 ==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1967년)|신민당]] 당수(黨首) [[유진산]]의 행동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다. == 전개 == === 시작 === [[유진산]]이 [[제8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에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로 등록하였다. [[영등포구]] 갑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장덕진(1934)|장덕진]]에게 지역구를 거저 내주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밖에 있던 [[신민당(1967년)|신민당]] 청년 당원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거센 항의를 계속하였다. 일부 청년당원들은 [[유진산]]에게 정계은퇴, 당 총재직 사퇴, 전국구 후보 사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으며, [[유진산]]의 자택 앞에서 [[유진산]]계열 [[신민당(1967년)|신민당]] 청년당원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급기야 [[1971년]] [[5월 7일]] 관훈동 [[신민당(1967년)|신민당]] 중앙당사에서 벽에 걸려 있던 [[유진산]]의 사진을 떼고 불태우는 난동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 수습 과정 === [[신민당(1967년)|신민당]] 비주류의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1910)|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운영위원회 소집에 앞서 친 진산 계열인 [[김영삼]], [[이철승]], [[이중재]], [[김재광]], [[김형일(1923)|김형일]] 등은 비공식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직 장악을 저지키로 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결국 [[신민당(1967년)|신민당]]은 [[김영삼]], [[이철승]] 등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김대중]] 중심의 비주류로 갈려 [[유진산]]의 은퇴 여부와 당수권한대행 문제 등을 놓고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일시 행방을 감추었던 [[유진산]]도 [[1971년]] [[5월 8일]] 성명을 통해 "나는 이미 당수직 사퇴 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 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라고 반격에 나섰다. 이에 [[김대중]]은 "책임을 지겠다고 한 당수가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어 당의 혼란이 마치 당권투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당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으로서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비난하면서 "당 운영위원회의 권한을 위임받고 있는 6인위의 결정은 합법적인 결정"이라고 맞섰다.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1923)|김형일]], [[이중재]], [[박영록(정치인)|박영록]] 등 당 중진들은 다음과 같은 중재안을 제시했다. *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 당수직에 대한 다음 승계권자인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1910)|홍익표]]의 사퇴 *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한다.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 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신민당(1967년)|신민당]]은 [[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유진산]]과 [[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신민당(1967년)|신민당]]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 당수 권한대행을 맡은 [[김홍일]]은 5월 11일 총선 기간 동안 모든 당무와 선거대책을 수립할 선거대책소위원으로 자신과 [[김대중]], [[윤제술]], [[김형일(1923)|김형일]], [[김재광]], [[이충환]], [[윤길중]] 등 7명을 위촉하고 선거대책본부 차장에 [[김의택]], [[정헌주]]를 임명해 본격적인 선거 체제를 갖춤으로써 4일간에 걸친 '진산파동'을 수습하였다. === 결과 === [[신민당(1967년)|신민당]] 중앙당은 그 기능이 마비 상태에 이르러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5월 11일]]부터 [[김홍일]]이 전국 지원 유세에 나섰다. 그리고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당 수뇌부를 각 지역에 파견해 바람을 일으키려 했다. 선거 직전까지도 진산 파동의 여파로 [[신민당(1967년)|신민당]]이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었지만 총선에서는 대선의 여세를 타서 개헌 저지선을 훌쩍 넘는 89석의 의석을 확보하고, 득표율도 44%를 차지하여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고작 4%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선전을 보이게 되었다. 정작 그 이후에 [[10월 유신]]이 펼쳐졌지만. [[영등포구]] 갑 선거구에 뒤늦게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훈(정치인)|박정훈]]은 결국 낙선하였다. 한편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진산 파동,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등을 거치면서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파벌은 또다시 변화하였다. [[유진산]]을 중심으로 뭉쳤던 범주류는 다시 [[김영삼]]계, [[고흥문]]계로 갈라졌다. 또한 [[이철승]]과 [[정해영(정치인)|정해영]]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비주류는 대통령 후보를 차지함으로써 당내 영향력이 커진 [[김대중]] 중심의 단일 세력으로 파벌이 재편되었다. 이들 비주류는 [[1974년]] [[정일형]]에 의해 화요회로 바뀌었다. [[분류:1971년/사건사고]][[분류:제3공화국/사건사고]][[분류:대한민국의 정치 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