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include(틀:당송팔대가)] [[http://img.kuaiji.com/ue/20160813/14710515951772.jpg|이미지]] {{{+2 曾鞏/曾巩}}}[* 참고로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Zēng Gǒng이다.], [[1019년]] [[9월 30일]] ~ [[1083년]] [[4월 30일]] [목차] == 개요 == [[북송]]의 문장가. 자는 자고(子固),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별칭으로 남풍선생(南豐先生)이 있는데 이는 그의 고향이 건창(建昌, 현 [[장시성]]) 남풍현이었기 때문이다.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왕안석]](王安石)·[[소식(시인)|소식]](蘇軾)·[[소철(시인)|소철]](蘇轍)과 더불어 [[당송팔대가]]로 불리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뛰어난 문인이었던 그의 친척들인 증조(曾肇)·[[증포]](曾布)[* 증공의 이복동생이다.]·증우(曾紆)·증굉(曾紘)·증협(曾協)·증돈(曾敦)과 더불어 南豐七曾(남풍칠증)으로도 일컬어진다. == 생애 == 12세 때에 육론(六論)을 썼고, 1057년에 구양수가 주최한 과거에 형제지간인 [[소식(시인)|소식]], [[소철(시인)|소철]]과 함께 급제한 후 문풍(文風)을 일신하게 해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태평주(太平州) 사법참군(司法参軍)을 거쳐 중앙에 들어가 편고사관서적(編校史館書籍), 관각교감(館閣校勘), 집현교리(集賢校理), [[송영종(5대)|영종]][[실록]]검토관(英宗實錄檢討官)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지방에 다시 나와서 월주(越州), 통주(通州)의 통판(通判), 제주(齊州), 양주(襄州), 홍주(洪州), 복주(福州), 명주(明州), 박주(亳州) 등의 지주를 역임했고 부임지마다 민중의 안녕과 행복 증진을 꾀하는 행정에 마음을 잘 써서 치적을 올렸다. 제주 지주로서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 할 때, 민중이 그 훌륭한 공적을 애석히 여겨 [[교량]]을 파괴한 채 증공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해서 밤을 틈 타 간신히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니... 이어 판삼반원사(判三班院事)로 재직할 적에, 국가의 재정이 근년에 들어 팽창하는 사태를 우려해 경비를 반드시 삭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송인종]]은 그 의견을 기꺼이 듣고서 "오조(五朝)의 치적은 증공의 판단이 옳다."라고 하면서 사관수찬(史館修撰)에 제수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갓 60세를 넘긴 참이었다. 1082년에 중서사인(中書舎人)을 맡고 1년 동안 근무하다 1083년 4월에 [[난징]]에서 죽었다. == 업적 == 서발(序跋), 잡기(雑記) 류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대표적 저서로 고금의 전각(篆刻)을 모은 <금석록(金石錄)> 500권과 시문집 <원풍유고(元豊遺藁)> 50권, <융평집(隆平集)> 30권이 있다. 먼 혈통의 인척 관계에 있는 [[왕안석]]과는 1041년경에 직접 알게 된 이후 평생에 걸쳐 친하게 사귀었다. 다만 왕안석의 신법을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왕안석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그 반성을 재촉하기도 하였다. 산문의 경우 화려함은 부족하지만, 끈기 있고 결실한 의론(議論)의 전개가 특징으로, [[청나라|청대]]의 고문가(古文家)인 요내(姚鼐)는 "증공(曾公)은 능히 그 단점으로 하는 곳을 피해 어기지 않는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당대 문인들 상당수가 그러했듯이 증공 역시 고전 연구에도 이바지하였는데, 현존하는 [[전국책]] 33편본이 바로 증공이 재교정한 고전으로, 일부 분실된 자료들을 사대부가에서 찾아 보정한 것이다. 증공의 재교정본은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라 불리기도 한다. == 여담 == 2016년 5월 15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친필 작품인 <국사첩(局事帖)>이 개시가격 1억 3천만 위안으로 시작해 최종 1억 8천만 위안에 낙찰되었다. 커미션을 더한 가격은 2억 7백만 위안이다. [[http://kr.people.com.cn/n3/2016/0517/c207466-9058771.html|#]]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19년 출생]][[분류:108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