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원 황제)]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db1><tablebgcolor=#004db1><tablecolor=#000> {{{#fff '''원 추존 황제'''}}}[br]'''{{{#fff {{{+2 穆宗 | 목종}}}}}}''' |||| ||<-2><#fff>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uchi_Khan.jpg|width=300]] || || '''[[묘호|{{{#fff 묘호}}}]]''' ||<bgcolor=#fff><(> '''[[목종]](穆宗)''' || || '''[[시호|{{{#fff 시호}}}]]''' ||<bgcolor=#fff><(> 도녕황제(道寧皇帝) || || '''[[성씨|{{{#fff 성}}}]]''' ||<bgcolor=#fff><(> 보르지긴(Боржигин)[br](孛兒只斤 / 패아지근)[br]{{{+5 ᠪᠣᠷᠵᠢᠭᠢᠨ}}} || || '''[[휘|{{{#fff 휘}}}]]''' ||<bgcolor=#fff><(> 주치(Зүчи)[br](朮赤 / 출적)[br]{{{+5 ᠵᠥᠴᠢ}}} || || '''{{{#fff 생몰 기간}}}''' ||<bgcolor=#fff><(> 1182년? ~ 1227년 || [목차] [clearfix] == 소개 == [[몽골 제국]]의 황족. [[칭기즈 칸]]의 아들. '조치', '죠치' 등으로도 발음하기도 한다. 특히 알파벳으로는 발음은 같아도 스펠링이 다른 경우도 많다. 원나라 건국 이후 쿠빌라이 칸에 의해 묘호 목종(穆宗)에 시호 도녕황제(道寧皇帝)로 추숭되었다. == 생애 == [[칭기즈 칸]]의 첫째 아들이지만 말이 많은 인물이다. 일단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가 적대적인 [[메르키트]] 부족에게 붙잡혀 약 1년 정도를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다가 돌아온 뒤에 낳은 아들이 주치고 주치란 이름 자체가 '''손님'''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치면 '길손이' 정도의 어감이다. 이에 대해선 주치가 태어났을 때 칭기즈 칸이 친구 자무카의 객장 노릇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칭기즈 칸의 동생들 중에서 카사르의 본명이 주치 카사르이다.] 주치가 진짜 칭기즈 칸의 아들인지, 아니면 보르테를 [[겁탈]]한 메르키트족의 장수 '''칠게르'''의 자식인지 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필 주치의 출생 자체도 굉장히 애매한데, 칭기스칸이 보르테를 되찾고 '9개월 뒤'에 나왔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9개월 뒤'가 당연히 정확하게 270일 뒤를 말할 가능성은 낮을테고, 현대 의학에서는 임신 기간을 280일 좌우로 계산하기 때문에 결국 친자식일 가능성과 아닐 가능성 모두 존재한다. 만약 좀 이른시기에 겁탈당해서 주치의 탄생과는 시간 간격이 좀 길어진다면 친자식일 가능성에 무게가 좀 더 실리겠지만... 칭기즈 칸은 주치가 자신의 아들이냐 아니냐 문제에 대해 노 코멘트로 일관하였지만 이런 애매한 상태 때문에 후계자 문제 때 다른 형제들(특히 둘째인 [[차가타이]])과 갈등을 빚었다. 메르키트놈의 자식이라며 대놓고 모욕했을 정도. 결국 아버지 말도 씹고 유럽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아버지 칭기즈 칸이 주치를 토벌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사실, 주치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병 때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주치는 유럽으로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또한 주치가 칭기즈 칸의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칭기즈 칸이 주치에게 러시아 초원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사건의 영향인지 주즈자니의 사서에선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나왔다. 참고로 이 사서엔 고증에 문제가 있는데, 예를 들어 이 때 무하마드 샤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고 하는데 무하마드 샤는 이미 죽은 뒤라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칭기즈 칸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그 다음 날까지 자신의 게르에 홀로 틀어박힌 채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죽음 이후 == > 칭기스칸의 큰아들 주치는 1227년 2월경, 아버지보다 6개월 먼저 아랄 해 북쪽 초원에서 죽었다. 비록 칭기스칸이 조치의 의심쩍은 출생을 공식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틈은 끝내 넓어져만 가고 있었다. 조치는 우르겐치 점령시에 참전한 것을 끝으로(1221년 4월), 그 후 1222년부터 1227년까지는 은퇴하여 자기 속령에 있는 투르가이와 우랄스크에 살면서 아버지가 추진한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우울한 움츠림은 칭기스칸을 얼마간 불안하게 했으며, 그는 큰아들이 자신에 대해 모반을 꾀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조치의 죽음은 그들 사이에 일어났을지도 모를 고통스러운 갈등을 막아주었다. > ----- >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pp.368-369 어쨌든, 이 일로 주치의 후예인 [[킵차크 칸국]]과 다른 칸국과의 사이가 벌어져서 몽골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이다. 예로 [[일 칸국]]의 훌레구 칸이 [[맘루크 왕조]]와의 전투에서 패해서 역습을 준비하려 했을 때 다른 곳도 아닌 킵차크 칸국에서 공격해서 이를 이룰 수가 없었고 맘루크 왕조에 몽골군과 싸운 경험이 있는 노예들을 판 것도 킵차크 칸국이었다. 하지만 주치 가문과 [[툴루이]] 가문의 경쟁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칭기즈 칸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몽골의 풍습에 따라 큰아들 주치에게는 '''부모의 주거에서 가장 먼 곳을 큰아들의 영역으로''' 남겨주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서쪽은 주치의 후손들에게 속하는 것이여야 했다. 그래서 유럽 원정 시에 주치의 아들 [[바투]]가 몽골 군대의 지휘관이였던 것이고. 하지만 툴루이의 아들 [[훌레구]]가 이를 무시하고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아버렸으니 주치의 후손들로선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이전만 해도 툴루이 가문이 대칸이 될 수 있게 후원해준 것은 [[바투]]였다. 또, 훌레구의 이란 원정에 1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견한 것이 킵차크 칸국이었다. 하여튼, 킵차크 칸국과 다른 칸국 간의 갈등은 출생 때문'''만'''은 아니다. 뒷날 [[티무르 제국]]을 몰아낸 [[우즈베크]]족의 시조가 주치이며, [[티무르]]와 대립한 라이벌인 킵차크 칸국의 [[토크타미쉬 칸]]도 바로 주치의 후손. 또한 티무르는 차가타이의 모계 혈통을 이은 후예를 자칭한 것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티무르를 포함해 차가타이 가문과는 죽은 이후에도 악연인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즈베크와 티무르 모두 튀르크계 언어를 쓰는 튀르크화된 [[몽골인]]이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 [[파일:attachment/주치/주치.png]] || [[징기스칸 4]] 등에서도 당연히 등장. 전투 90, 정치 58, 지모 74에 건설, 기동, 연사, 공성 특기를 가지고 있으며 시나리오 1에서 몽골로 시작하면 시작과 동시에 아군으로 들어온다. 칭기즈 칸의 아들답게 강하지만[* 사실 [[호라즘 왕조]] 정벌 때 맹활약했다. 칭기즈 칸의 본대보다 먼저 제베와 함께 빙 돌아가 선봉을 맡았는데 이 와중에 지치고 굶주린 병사를 가지고 급습한 샤의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제베는 상황이 불리해 후퇴를 하려고 했지만 주치는 이를 거부하고 맞서 싸워 샤를 격퇴시킨다.] 행적을 반영한 건지 혈연인데도 처음 충성도가 너무 낮다. 군주가 되었을 때 연회에서의 고유 대사는 '''내 출생에 대해 항상 고민해왔는데... 그대의 얼굴을 보면 모두 잊어버릴 것만 같다'''이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칭기즈 칸과 보르테의 장남으로 구현되어 있으며, '''사생아 관련 트레잇이 붙어 있지 않아서''' 플레이하기에 따라 주치가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대칸이 되기도 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원사)]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주치,version=80)] [[분류:보르지긴 가문]] [[분류:사조영웅전의 등장인물]] [[분류:원나라의 추존 황제]] [[분류:1182년 출생]] [[분류:1227년 사망]]